정의의 검을 뽑자 누구인가?

조규남 편집위원 승인 2013.03.11 12:10 의견 0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서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미움의 대상에 대한 최악의 복수입니다.

그런데 '묻지마 살인'은 개인적으로 미움의 대상이 아닌,

가해자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 피해자가 되는 것이기에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사회 전반에 관한 원한 관계로 확대된 사회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일이 꼬일대로 꼬여 감정이 최악의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될 때,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계 맺지도 않은,

그리고 한 번도 그 존재를 생각해 보지도 않은 신(神)에 대해서까지 원망과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분노에 대한 전통적인 대처 방법은 인내입니다.

한국이 대표적인 나라이고, 이로 인해 한국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홧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래서 한국의 심리 치료사들은 홧병 환자에게 속에 쌓여 있는 화를 품지 말고 밖으로 토해내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홧병 환자이건, 우울증 환자이건, 기분나빠 살 맛 나지 않는다고 절망감에 빠진 사람이건,

누구든지 간에 자기 감정을 속이지 말고 솔직히 표현하여 터뜨리라고 말합니다.

화가 나면 화를 속으로 삭이지 말고 겉으로 화를 내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분노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합니다.

 

 

현대 프랑스의 최고 지성이라 일컫는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맞서 싸웠던

레지스탕스 투사 출신으로서 저항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저서 <분노하라>는 최고의 가치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히 참고 있지만 말고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악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분노로 표현되는 것은 정당한 분노로서,

이 사회를 선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 선조들이 "무조건 참으라.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마음 속으로 참을 인(忍)자 세 번만 쓰라!"고 말하던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다시 <참여하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분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의 속마음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출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자신의 감정만 드러내는 것으로서는

사회 변화의 모티브가 될 수 있으나,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적극적으로 나만의 세계에서 이웃과의 삶으로 들어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영화로도 소개되고 있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역시 프랑스의 저항문학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장발장은 굶주림에 죽어가는 조카를 위해 훔친 빵 하나로 인해 감옥살이 하지만,

그가 답답했던 것은 빵 한조각의 도둑질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 조카의 생명이 맞바뀔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면 장발장을 끝까지 추격하는 형사 자베르의 딜렘마 역시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장발장은 아무 조건없이 자기를 살려주었는데, 자기는 자신의 업무상의 범위 안에서만 국한하여

지금은 옳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장발장을 잡아 죽여야 하는가의 고민입니다.

결국 그는 이 문제의 갈등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이 사건으로부터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정의에 대한 규정이 어려운 것은 상황윤리 면에서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상황적인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원리원칙만을 고수할 때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원리원칙을 무시한다면 이는 모순과 갈등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여기에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겠습니까?

 

 

나의 분노는 정의에 입각한 정당한 분노이고, 너의 분노는 개인적 감정에 의한 화풀이일 뿐이라고

누가 판단하며 구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Justice 정의>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ahel J. Sandel)은 분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분노는 자격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특별한 종류의 화다. 다시 말해, 부당함에 대한 화다."

그러나 이 역시도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재행위 가운데서 그 무엇이건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없는지를

어떻게 구별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각자 자기 주관에 의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뿐인 것일 테니까요.

 

 

오랜 세월 동안 우뚝 버티고 서있는 저 바위 위에 꽂혀 있는 검을 누가 뽑을 수 있습니까?

분명 정의의 검을 휘두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복수심이나 분노의 감정으로 저 검을 뽑으면 안 됩니다. 오직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만 검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라면 그 정의는 결코 옳은 정의일 수 없으며 옳게 사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를 감싸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고전 13:7)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실상 정의의 표현 수단으로서의 분노는 이와 같이 오랜 인고(忍苦)의 과정들을 거쳐

여과된 분노일 때만이 참다운 정의의 갑옷으로서의 분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호, 애재라!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누가 과연 이런 과정을 통한 '정의의 갑옷'으로서의

분노를 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감정이 배제된 분노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분노'에 대해 연구해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분노만이 인간의 감정을 떠난 진리와 공의의 분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정의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 검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에 인도된 성령의 검,

즉 하나님 말씀의 검만이 우리에게 정의의 검을 뽑을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갖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2013년 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정부가 탄생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단순한 원한감정이나 개인감정의 분노에 의한 정의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서 서로의 허물을 감싸안는 대통합의 새 해, 새 정부의 출범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Abraham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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