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문

무관용의 정치과 그 결과

최성수 편집위원 승인 2012.11.28 09:44 의견 0

무관용의 정치와 그 결과

<두 개의 문>(김일란/홍지유, 다큐멘터리, 15세, 2012)

 

 

경제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대통령 당선 후 취임 직후부터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촛불 시위를 통해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른 MB 정권은 연이은 집단행동에 쐐기를 박는 의미에서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집단행동에 대해 무관용의 원칙을 내세웠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 정부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치에 있어서 관용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묘미는 다수의 의견이 상충하면서도 소통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 평화를 구축해나가는 데에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이기에 통치자의 이념에 따라 혹은 어떤 특정 정당이나 이익 단체의 견해를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주의와 독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이다. 민주주의에서는 소수를 결코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다수의 이익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통치 기술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관용은 매우 중요한 통치 덕목에 해당한다. 관용은 대화를 유도하고, 대화를 통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며,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가 구현하기 위해 정치가 존재한다. 정치와 관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정치에서 무관용의 원칙은 도대체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이런 질문을 화두로 삼고 제작된 독립영화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은 이명박 대통령의 담화 가운데 소위 불법적인 집단행동에 대해 무관용의 원칙을 밝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영화가 용산참사를 매개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2009년 1월 20일 용산4구역 철거 현장 화재 사고, 일명 ‘용산참사’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공판 기록, 관련자들의 법정 증언, 농성자들의 범법 행위를 확보하기 위해 경찰측이 준비한 채증 영상, 그리고 인터넷 방송 기자에 의해 찍힌 영상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면서 당시 사건의 진실을 탐색한다. 다시 말해서 무관용의 원칙과 사건의 상관관계를 밝히려는 것이다. 무관용의 원칙을 표방하는 정치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몇 가지 결과들을 영상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첫째, 영상을 통해 본 실상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특공대원들에게조차도 지옥과 같이 느껴질 정도의 끔찍한 현장이다.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이 숨지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 사건이 검찰과 정부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흔히 “용산참사”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화재와 사망사건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무관용의 정치가 과잉진압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그 이후의 많은 집단행동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의 선례가 되었다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무관용의 정치는 과잉진압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둘째, 영화가 의문을 제기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사건 역시도 <부러진 화살>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사건의 진상을 이해하고 판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결정적인 증거를 검찰과 경찰이 감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2000페이지 정도의 초동수사 기록을 감추고 제출하지 않는 것일까? 채증 영상 중에서 사건의 진상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영상의 부분은 왜 사라진 것일까? 변호인 측에서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경찰 측에서 숨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서도 재판 과정은 공정할 수 있는가? 은폐의 정치는 두려움으로부터 온다. 그것이 무엇이든 감추려는 것은 발표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파국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공안정국과 사찰정국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영화가 특별히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세입자와 전국철거민 연합회 회원들은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망루를 세우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에서 벌어진 참사가 농성 하루 만에 일어났고, 또 대 테러전을 위해 훈련된 경찰 특공대까지 동원하며 진압할 상황이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과잉진압은 농성중이던 시민이나 진압을 위해 투입된 경찰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게다가 사고일지와 각종 증언들과 영상들을 볼 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옥상의 가건물 안에 발화물질이 많다는 것을 대원들에게 숙지시키지 않고 무작정 투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는 일련의 의혹들을 통해 당시 책임자로 있던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승진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추측한다.

끝으로 사실 다른 쪽의 견해를 반영하지 못한 까닭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뿐 진실을 밝히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예정된 시나리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사건일지를 되돌아보며 사고발생의 책임소재와 관련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논란을 통해 침묵을 깨우려는 것이다. 당시에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서 의문은 증폭되고 확산되어 각종 여론에 회자했지만, 희생자와 관련된 사람들과 몇몇 관련단체들을 제외하고는 국민 대다수가 동조하지 못하고 침묵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국민들의 침묵은 정부의 발표를 믿는다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무관용의 정치 상황에서 국민들의 침묵은 강요된 관용의 표현이었던 것인가?

사회영화로서 이 영화는 정치 경제 사회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인 책임의식을 일깨워주고, 그런 현실 가운데 드러나는 피해자들에 대한 돌봄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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