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기다림입니다.
"다시 바다에 나가 배타고 싶은 맘 없어?"
며칠 전 합창단 연습 모임에서 가까운 선배 한 분이 지나가듯한 말투로 불쑥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아마 자유분방한 내 삶을 바라보며 이렇게 좋은 계절에 그 옛날의 넓은 세계를 그리워하리라 생각해서였을 겁니다.
"어떤 때는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일탈을 꿈꾸듯 그렇게 떠나버리고 싶기도 하죠. 낭만적인 생각이 많지만..."
이렇게 대답하고나니 정말 바다가 그리웠습니다. 육지에서 보이는 바다 말고, 아주 머~언 바다 말입니다.
그러나 되집어 생각하면, 먼 바다는 낭만적인 생각 말고는 매일의 똑같은 삶의 일상에 얽매이는 권태가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 저런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은 점점 자극적이 되어 갑니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모험과 도전으로의 변화는 사람의 눈빛을 반짝이게 하는 동기유발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에 있어서도 한계점이 있기에 사람은 또 권태로워하고 그리고 또 다른 변화를 찾게 됩니다.
매튜 체프먼(Matthew Chapman)은 진화론을 주창한 챨스 다윈의 고손자이며 영국 캠브릿지 출신의 영화 감독입니다.
2011년 Sundance 영화제 드라마 부문에 출품했던 영화, <The Ledge>는 변화에 대한 상대적 삶의 방식들을 보여줍니다.
한 여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무신론자의 대결 구도로서 실제 종교문제로 격한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애정의 삼각관계로 좀 복잡하게 얽힌 내용인데,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있었던 부분은 이 영화의 종결입니다.
극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와의 보이지 않는 대결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 무신론자 주인공은 연인을 살리기 위해
자살 아닌 자살을 택합니다. 영화의 흐름은 실제 가해자 격인 무신론자보다 피해자인 편이지만
무신론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기독교 근본주의자를 향한 비난으로 이어져 끝을 내게 됩니다.
무신론자인 영화 감독 매튜 체프먼은 주인공 무신론자의 입을 빌어 자신의 종교관을 피력합니다.
자신의 율법 기준에 따라 상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극단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훈훈한 인간미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그 삶이 종교적 틀에 묶이어 매력도 재미도 그 어떤 인간적 끌림이 없습니다. 냉엄하기만 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정말 맘이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어 지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나오는 건 하품 밖에 없는데, 그것도 눈치보며 기지개를 켜야 하니 질식할 노릇입니다.
반면 무신론자는 무질서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인간적인 면에서 매우 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 곁에 있으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불안감이 때로 권태를 벗어나게 하는 긴장감을 더해주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이런 불안감은 안절부절 결국 사람을 긴박감의 극치로 몰아 돌아버리게 하든가 아예 죽어버리게 만듭니다.
사실 무신론자는 종교의 영역을 떠나서라도 유신론자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이 없다는 것,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 믿음은 유신론적 믿음보다 더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없는 것(無),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을 믿음으로 갖는 것은 허무와 두려움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무신론자보다 더 주위 이웃들을 어렵게 만들고 골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극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운 전통과 율법의 기준에 얽매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바리새적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아니 인생 자체가 기다림이고,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은 가만히 앉아 있는 정적 상태의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기다림은 바로 그 새로운 변화를 자신의 내면세계에서부터
새로운 소망의 씨앗으로 배아시켜 만들어 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창조의 과정들입니다.
어미 뱃속의 태아가 탄생하므로 일어나게 될 변화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기대감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인내가 뒤따릅니다. 기다림의 끝은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없을 때 무신론자가 되거나 또는 극단적 폐쇄주의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무신론자는 허무한 죽음에 이르고, 근본주의자는 주위를 아프게 하는 회한을 남깁니다.
무신론자는 곧 오실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고질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사람의 변화를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허무와 회한이 따르는 결과들입니다. 모두 옳지 않습니다. 기다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화의 나라와 같은 언덕의 큰 나무 그늘 밑 나무 의자에서 소녀가 기다림의 눈빛으로 멀리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소도, 양도, 허수아비마저도 모두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높푸른 가을 하늘이 정겹고 하늬 바람이 시원함을 가져다 줍니다.
가을입니다. 목마른 인내의 기다림 끝에 열매를 거두는 귀한 손길들의 축복의 시기입니다.
이제 곧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기다림입니다.
Abraham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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