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위에서

조규남 편집위원 승인 2012.11.27 07:46 의견 0

 

그와의 교제가 시작될수록 그는 내게 희망의 빛으로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식사를 일찍 끝내고 햇볕이 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다가 잠시 졸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전 그 따뜻하고 아늑한 나의 공간이 갑작스런 전화벨소리로 평화가 깨지고 분주해졌습니다.

K.Sun의 약간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목사님, 저 드디어 맘을 굳혔습니다. 신학 공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K.Sun은 올해 34세의 미혼 청년입니다. 나와 알게 된 것은 6개월 정도 남짓입니다.

내가 책임자로 있는 상담기관을 통해서였는데,

이런저런 과정들을 거쳐 결국 내 손에까지 오게 돼 그 때부터 나와의 상담관계가 시작됐습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하루에도 두 세 번 이상 전화를 해댑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전화질(?)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가 결국 내 손에까지 온 것인데, 내가 그의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주고

또 전화 에티켓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교육하자 그의 전화질은 서서히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저 K.Sun입니다. 지금 전화 받으시는 데 불편치 않으세요? 아~ 지금 바쁘시다고요. 예~ 그럼 다시 하죠.

언제쯤 전화드리면 될까요? 예? 목사님이 알아서 전화할 테니 그냥 있으라고요? 예. 그냥 기다리겠습니다."

- 이 정도까지 그의 전화 에티켓은 발전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 역시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전혀 귀찮다거나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내가 맘을 주기 시작한 것은 그의 성가실 정도의 전화질을 어떻게 정리할까 하고 고민하던 중에 어쨌든

그가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에 한 번 찾아가보고 결정하자 라고 생각하여 그를 병원으로 찾아간 후부터였습니다.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 아래 층의 신장투석실에서였습니다.

그의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신장 투석기에서 붉은 피가 그의 몸안과 기계 사이를 계속하여 돌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채로 귀에 리시버를 끼고 음악을 듣고 있어 내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도 알지 못 했습니다.

 

 

내가 살짝 그의 손을 잡아주며 "K.Sun형제, 나 조목사님이야." 하고 말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 손을 덜컥 잡았습니다.

상체를 일으킨 채 감격스런 표정으로 내 손을 잡은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습니다."

 

 

그는 심한 당뇨로 인해 7년 전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3년 전에는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부터 신장 투석이 시작되어 4시간씩 일주일에 3번 신장투석실을 다녀가야 합니다.

주위에 돌봐주는 가족도 없이 그나마 복합 장애인에 대한 나라의 배려로 이렇게

그야말로 3중고(重苦)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와의 교제가 시작될수록 그는 내게 희망의 빛으로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절망에 가까운 탄식이 터져나왔고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 이외에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관계에서 위로를 받고 기도를 받는 것은 매번 그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나의 안부를 묻고 문제거리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그 방법론을 찾고 또 알려줍니다.

어떤 때는 인터넷에 좋은 음악 사이트가 있는데 음악 파일을 전부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귀띰으로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는 나와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철저히 예의바른 순종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신뢰감으로 많은 것들을 물어오고 또 나의 조언대로 즉시 실행에 옮겨 계속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나로서는 너무 신나는 일이며 보람을 느끼는 일입니다. 그는 계속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뜨거운 젊음의 열정과 미래를 향한 강렬한 희망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열정을 내 어찌 잠재울 수 있으며 무슨 수로 그의 희망의 빛을 차단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가 붙들고 있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를 덮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그는 대학 수능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공부를 시작할 것이며 그에 앞서 점자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점자를 익히게 되면 더 많은 양의 독서로 그의 지식의 세계는 그의 생각 안에서 확장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아니 그 몇 배 이상의 암기력과 기억력

그리고 상상력으로 놀라운 세계를 열어갈 것입니다.

 

 

물 위의 외줄기 장대 위에 걸터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치 서커스를 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무슨 말로 그의 미래를 축복할지가 궁금합니다. 아마 이렇게 말해줄 듯 합니다.

"얘, 아이야~ 인생은 결코 평탄치만은 않은 거란다. 앞으로 네가 살아가야 할 인생길도 그렇단다.

이렇게 외줄기 장대 위에 걸터 앉아 아슬하슬하게 곡예사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붙들어 매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겨보자꾸나.

이 할아버지가 뒤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걸어가거라."

 

 

오늘 걸려온 그의 전화는 좀 별스러웠습니다.

"목사님, 어제 강원도 잘 다녀오셨어요? 보고싶었는데..."

"야~ 어제도 전화하고 무슨?... 그나저나 넌 시각장애인이라 날 보고싶다고 해도 볼 수가 없잖아."

"아니, 꼭 그렇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목소리 듣고 싶단 말로 들으시면 안 돼요?"

"어~허, 그래. 미안하다. 내가 말 실수한 것 같다. 정식으로 사과한다."

"그렇담 제 청 하나를 들어주셔야 해요."

"그래, 그러지 뭐. 그게 뭔데?"

"한 번만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

 

 

나는 그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험난한 인생길을 뒤에서 격려해주고 지지해 줄 그런 좋은 아버지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처럼 좋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Abraham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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