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상실의 시대>(트란 안 홍, 멜로,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1)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다. 기독교인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인 표현이 많지만, 성을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코드로 본다면 그다지 주저할 일은 아니다. 소설의 명성을 그대로 되살리지는 못했어도, 그리고 영화는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영화를 보았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느낌도 있다. 사랑하는 여자인 나오코가 상실의 고통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겨울 바닷가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는 와타나베의 상실감은 소설만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장면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오코가 머물러 있는 요양원의 노스탤직한 배경 역시 마찬가지다. 감독은 소설의 글귀를 그대로 대사로 사용할 정도로 소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해도, 영상적인 표현에는 감독 특유의 감각을 발휘한 것 같다. 세부적인 감정 묘사와 정치 사회적인 배경, 그리고 성적인 표현으로 가득한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생략된 것들로 인해 영화에 실망하겠지만, 둘은 서로 구분되어 이야기 되어야 할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일본 역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던 60년대다. 좌익 대립과 학생 운동으로 시끄러운 때인데, 이런 혼란의 시기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청춘남녀의 연애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가 독자나 관객에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후자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이해했다. 혼란의 시기를 지배하는 암울한 정서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청춘 남녀들의 사랑이야기라고 할까. 어떻게 보든 영화의 내용은 남녀의 이야기다. 특히 상실에 초점을 두고 전개된다. 그리고 상실의 이유를 언급하는 부분은 대체로 성을 매개로 이뤄지는 남녀 관계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코가 와타나베와의 성관계 후에 ‘잃어버린 것을 7년 만에 다시 찾았다’고 말한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상실은 서로 온전하게 소통하지 못해서 오는 결과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나오코는 친구의 자살로 존재의 상실과 동시에 관계를 잃어 상실감을 느끼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키즈끼는 나오코와의 애정 관계에서 결코 성관계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자살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온전한 소통의 부재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 아닐까? 나가사와의 애인은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로 인해 상실감을 느끼고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하였다. 그녀의 죽음 역시 소통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도리는 엄마를 잃고 난 후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상실감 속에서 포르노적인 사랑 이야기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사랑을 통해 소통하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온전한 소통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실감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상실의 시대를 책임있게 증언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은 어그러지고, 온전하지 못하고, 열망만으로 가득한 채 결코 상대에 이르지 못한 소통 관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의 캐릭터를 재현한다. 마지막에 미도리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는 질문은 소통하지 못한 삶, 곧 현대인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준다. 위치라는 것이 사실 관계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수학은 x와 y 그리고 z로 표시되는 좌표로 3차원의 공간을 만들고 어떤 존재를 그 안에 정립시킨다.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언어이며 위치이고, ‘너’의 위치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그들’ 혹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 된다. 즉자는 대자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법이다. 그런데 대상이 사라지거나 소통하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면, 도대체 나 혹은 우리의 위치는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영화가 던지는 화두다. 대한민국의 80년대와 같이 정치사회적인 격동기를 살았던 60년대의 일본의 젊은이들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것은 소통의 부재였다.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에 바빴던 시대에서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단절되었거나 혹은 왜곡된 관계로 자족해야만 했다. 혹은 자조적인 태도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가든가. 이런 소통의 부재가 편만한 시기에 젊은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정서를 하루키는 “상실”로 표현한 듯 하다. 특별히 성과 관련해서 표현한 것은 성이 성인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과 마찬가지로 소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실의 시대>는 소통의 부재를 현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절망감과 허무감을 잘 표현한 소설이며 영화라고 생각한다. 소통의 부재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상실은 또 다른 상실을 낳고, 소통의 단절로 인해 계속해서 자살과 절망감, 허무감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오는 상실이 단지 소통의 재개를 위한 노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구원을 필요로 함을 암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