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에 잊혀지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

조규남 편집위원 승인 2012.04.23 20:08 의견 0

내 평생에 잊혀지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

우리 모두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늦게서야 목사가 되었지만 이제쯤 기독교 신앙이 뭔지 알만 한 때가 되었으면서도

아직까지 계속하여 내 안에서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인가?"

 

사실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인하였고,

또 역설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고민 끝에 '믿음' 을 붙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것은 '본다'고 말합니다. 들을 수 있는 것은 '듣는다'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은 '안다'고 말합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어서 이해가 되는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확인하여 알 수 없는 것들의 인식세계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내 가까운 이웃의 죽음에 대해 나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다시 질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정의로우십니까?"

오래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꺼냈지만, 그분은 이번에도 역시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저서, <침묵>은 이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삼성기업의 창업주인 故이벙철 회장이 죽기 직전,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24개의 질문서에 대한 답변으로 차동엽 신부가 펴낸 책, <잊혀진 질문>은 사실 내 생애에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 모두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병철 회장에 대해 안타까운 것은 그가 결코 알 수 없고, 얻어 낼 수 없는 질문의 답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접근을 그토록 큰 기업을 일궈낸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인생의 삶과 죽음 모든 것을 그 섭리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 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 임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런 우를 범한 것입니다.

법정에서 예수를 심문대 앞에 세워놓고 "진리가 무엇이냐?" 고 물었던 빌라도의 질문 역시 그런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부자는, 자신이 '힘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의 좁은 문을 통과할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관원)의 질문에 답하셨던 대로, 자신의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따르기 전에는,

자신에게 더 이상 의지할 게 아무 것도 없는 밑바닥에 이르러 절대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기 전에는,

천국의 좁은 문을 통과할 믿음을 갖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은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식세계 안에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 인간의 인식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알고서, 이해하고서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아지고 이해되어진다는 공식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내 의지가 아닌 하나님 은혜 안에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예수 믿는 이유를 물을 때 가끔 나는 목사답지 않은 엉뚱한 대답으로 주위를 당혹하게 합니다.

"억울해서요. 이렇게 그냥 살다 가면 너무 억울해서요.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의 고달픈 내 삶을 그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고 한스러우니까요."
"굉장히 원색적인 종교관을 갖고 계시는군요. '예수 천당!' 이라고 떠드는 사람들 같아 좀 그렇네요..."

"아니 예수믿는 목적이 죽은 후에 천국가는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종교는 근본적으로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좇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요?

정의롭게 살고, 공평하게 살고, 선한 행실을 베풀고, 마음을 평정하고...

이런 것들은 꼭 예수 믿어야만 하는 것 아니죠. 예수 안 믿어도 당연히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죽음의 문제만은 예외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으까."

"그럼 목사님은 죽은 후 천국가기 위해서만 예수 믿나요?"

"천국가기 위해서이라면 말에 어폐가 있고,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 힘만으로 할 수 없는 가치있는 일들을 신앙의 힘에 의지해 이루고자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예수님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니까."

 

잠시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너무 불공평한 일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의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보다 악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그리고 악인이 의인보다 훨씬 더 부귀영화의 안락한 삶을 누리며 사는 듯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입니다. 이게 불공평하고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일 내 삶이 이렇게 이걸로서만 끝난다면 나는 너무 억울하다 이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든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도저히 제 힘으로는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사람들은

부자 재벌과 그 집에 태어나 일생을 기분좋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자괴감과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 부모조상 덕에 편안한 삶을 누리는 故이병철 씨(氏) 자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입니다.

(* 심판대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會長이 아닌, 한 인간을 지칭하는 氏일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부자라고 슬픈 일 없겠습니까만 그것이 싫어 부자가 부자되기를 포기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다고 기쁜 일 없겠습니까만 그것이 좋아 가난한 자의 삶을 끝까지 살겠노라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래저래 모두 부자로 살고 싶은 것인데, 그리고 나도 부자가 되기 위해 입에 단내를 풍기며 이 무한경쟁 사회에서

죽어라고 뛰는데도 도저히 내 한계선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게 너무 속상하고 억울하게 생각된다 이겁니다.

막말로 어떤 놈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니 원망스럽다는 거지요.

조상 탓이든 내 탓이든 어쨌든 말입니다. 너무 피해의식이 많으신 것같다고요?... 맘대로 생각하십시요! 칫~

 

그리고, 그리고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나 역시도 하나님 보시기에 이 '나쁜 놈'들의 부류에 속한다면 별 수 없습니다만... ㅠㅠ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24:19-20)

라고 말하며 그나마 나의 이 고약한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기 말고도 뭔가 또 다른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이 모든 불공평을 공평으로 바꾸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늘과 땅의 간극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을 없애고 공평케 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평'의 영어 표현인 'fairness' 는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공평이라는 뜻 외에 살결이 희고 머리가 금발인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 끝없이 펼쳐지는 황금 들판 위에 노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살결이 흰 백인이고 아울러 머리가 금발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fairness의 뜻에 꼭 부합하는 노부부 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부부가 화목하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온 듯합니다.

그러나 행복했을 법한 그들에게도 이제는 나이 늙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이 공평하게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제 곧 '공평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람결에 비뚤어진 남편의 모자를 고쳐 써주는 백발의 할머니 모습이 참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AbrahamJo

 

 

지금 시점에서 지나온 세월 뒤돌아보니 뭐 그리 특별나게 억울한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나 남이 가진 재물, 지식, 건강 없지만 그래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는 송명희 시인의 신앙고백은

곰곰히 따져보면 여호와를 내 목자로 삼은 이후 한 번도 부족함을 느껴보지 못한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내가 보기에 어떤 나쁜 놈들은 반드시 죽은 후에라도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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