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보이는 이 시대의 자화상
근 몇 년 사이에 상영된 한국 영화에서 특징적인 점 한 가지는 과거에 비해 공권력(경찰, 검찰, 정치가, 사법기관 등)의 부패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야수>, <공공의 적 2>, <박수칠 때 떠나라>, <부당거래>, <특수본>, <범죄와의 전쟁> 등과 같이 문학적인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홀리데이>와 <도가니> 그리고 <부러진 화살>과 같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들도 있다. 어떤 형태든 분명한 것은, 영화는 당대의 기술력이나 사회적인 배경 등 역사적인 한 계기와 관련해서 생산되며, 현대인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의 단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몇 편의 영화들을 통해 우리시대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교회의 시대적인 과제를 모색해보도록 하겠다.
<홀리데이>는 안석(최민수)이라는 한 인물로 육화된 공권력과 그 앞에서 무력하게 당하는 자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88년 10월, 9일 동안 지속된 탈주극과 인질극을 소재로 다루는데, 흔히 ‘지강헌 사건’으로 알려진 탈주범들의 실화를 허구적인 구도 속에서 재현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서울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미명하에 깡패들을 동원하여 달동네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무참하게 빼앗고 거기에 저항하는 자들을 폭행하였다. 공권력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묻게 만드는 일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지은 죄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지켜본 죄수들은 좀도둑만으로 10년 넘게 살아야 하는 자신들과 비교되는 판결 때문에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형량보다 더 긴 보호감호기간에 대한 부당함을 토로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는 지강혁(이성재)은 공권력이 돈과 정치의 노예로 전락한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영화의 본래 의도는 전두환 때에 제정된 보호감호법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영화였지만, 영화를 통해 전해진 대중적인 메시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압축된다. 이것은 공권력이 가진 자들 앞에 얼마나 무력하고 또 못 가진 자들을 얼마나 부당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부당거래>와 <특수본>은 경찰의 타락을 다룬다. 먼저 <부당거래>는 사건해결에 대한 압박을 받는 경찰들이 범죄를 거래하는 내용인데, 영화는 범죄 사건에 대한 여론의 집중적인 조명에다 대통령까지 관심을 표명하자마자, 사건 해결과정이 의외로 쉽게 처리되는 일을 문제시 하며 그 배경을 추적한다. 그토록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이 대통령의 관심 표명 이후에 과연 그렇게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까? 혹시 꼼수는 없었나? 영화는 바로 이런 의문을 추적하면서 가상적인 범인을 거래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즉,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범인을 가상으로 만들어내고, 그 반대급부로 범죄에 대해 눈을 감아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특수본>은 일련의 범죄 사건에 경찰이 어떤 이유에서 연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경찰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해 설치한 특별수사본부, 미국연방수사국 FBI에서 연수중이던 범죄심리학 박사까지 동원해 수사할 정도로 비중 있는 사건이다. 수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건에 동료 경찰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수사가 진행되면서, 더 큰 몸통이 숨어 있다는 단서를 확인한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단서로 고조되는 긴장감과 심리적인 불쾌감은 경찰 상호의 관계를 깨뜨릴 정도가 되고, 수사 과정에서 거듭되는 해프닝으로 수사는 난항을 겪는다. 결국 ‘특수본’ 자체가 해체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통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별도로 수사에 착수한 결과로 그들이 찾아낸 실체는 바로 자신들의 직속 최고 상관인 경찰서장이다. 그런데 경찰서장으로서 저지른 범행의 동기라는 것이 지극히 단순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하다. 경찰관으로 살면서 경제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사회에서 범죄가 멈추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죄를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정의롭지 못한 자신의 행위와 욕망을 은폐하는 변명에 불과하지만, 어째든 경찰로서 자부심을 갖고 시작했어도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또 생계 문제가 겹쳐지면서,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결국 그 역시 부하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영화는 사회정의의 자존심을 세워준다.
<부러진 화살>은 판결에 불만을 품은 김경호 교수가 담당 판사를 찾아가 벌인 ‘석궁테러 사건’을 소재로 다룬다. 영화는 판사들이 사법기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겉옷과 속옷에 묻은 혈흔이 동일한 사람의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피해자 자신의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검증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물인 구부러진 화살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리고 석궁으로 맞았다고 볼 수 없는 상처 등과 같은 석연치 않은 일들로 가득하지만, 판사들은 변호인의 요구를 무시하고 검사 측 논거를 채택해서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실 재판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보니, 만일 이것이 선례가 되면 다른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동일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와 판단에서 사법기관은 매우 단호한 조치를 필요로 했을 것이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황이다.
영화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변호사 측이 제시했을 것 같은 자료들은 많아도, 판사들로부터 얻은 정보는 전무함을 짐작할 수 있다. 공판기록에 의지했다고는 하나, 사실 최종 재판에는 공판 과정 자체가 기록되지 않아서, 영화의 내용은 어느 한쪽의 주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화에 대한 판사 측의 반론은 바로 이점을 문제 삼으며 제기되고 있다. 판사 측이 옳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변호인 측이 요구한 사항을 왜 무시했는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도록 밝히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제2의 <도가니>가 될 지는 바로 이점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과거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 대한 공안판사들의 억지스런 법 해석과 적용의 역사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시대와 상황이 많이 바뀐 시기라 사실 많이 당황스럽다. 무엇이 진실이고 또 무엇이 정의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다. 만일 대한민국 재판이 계속 이런 식이었다면, 그리고 앞으로 계속된다면.... 이런 의심들이 뇌리를 강하게 파고든다. 영화 한편이, 아니 진실에 대한 불확실함이 대한민국 사법행위에 대한 더 큰 불신으로 이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는 1990년대 보통사람을 자칭하던 노태우가 선포했던 범죄와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제목 “범죄와의 전쟁”은 공권력이 전면에 나선 시기를 염두에 둔 것이고, 부제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는 조직폭력배(깡패)의 주먹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부제가 말하는 ‘나쁜 놈’이 누구인지를 말하진 않고 있지만, 공권력이든 조직적인 폭력이든, 아니면 양자 사이를 저울질해가며 이득을 취하는 소시민이든 상관없이 갖가지 이유로 부당한 힘에 의지해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모두를 포괄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두 개(공권력과 조직폭력배)의 힘이 어떤 역학관계를 가졌고, 또 그것은 어떻게 공생하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은 현실을 정의하는 힘이 있고, 길거리 폭력은 문제 해결의 힘이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 두 개의 힘이 때로는 상호 부조하고, 때로는 상호 충돌하며 대한민국의 권력을 어떻게 요리해 나갔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공권력과 깡패의 폭력,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줄다리기하며 생계를 위한 힘을 공급받아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재현하면서, 힘이 지배하는 세계의 본질과 그 파국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리의 중심에 있는 자의 아들이 검사가 되는 마지막 장면은 권력의 추구가 되물림되며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더욱 깊이 조명된 부분은,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시기에 얽히고설킨 힘들의 역학관계,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힘에 빌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두 개가 아니라 세 개 힘의 틈바구니에서 핑퐁게임을 하는 최익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혈연관계의 힘고, 다른 하나는 공권력이며, 마지막 하나는 의리로 맺어진 조직폭력배 힘이다. 그리고 모든 힘들은 제각기 가족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또 가족을 위해 실행됨을 재현한다. 그러니까 모양은 달라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유사하다. 공권력 역시 공직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며 협력하기 때문이다.
최익현은 이런 힘의 줄다리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다. 그 역시 힘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힘을 추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세가 아니면서 힘의 논리에 빌붙어서 살아가는, 그래서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힘은 마치 장전하지 않은 총과 같다. 위협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실효성이 없는 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붙들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소시민들이다.
영화 속 공권력의 부패, 정의의 상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영화 속에 나타난 공권력이 타락하는 이유들을 보면, 대체로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심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가장 흔한 것은 가족의 생계 문제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핑계로 불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승진을 위한 실적을 올리기 위함이다. 세 번째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네 번째는 권력 자체의 부패한 속성 때문이다. 권력은 원래 국가 정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힘이지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불의로 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타락하는 공권력을 다루는 영화에 비쳐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정리해서 말한다면, 강력한 힘과 막대한 부를 추구하는 모습이며, 공익보다는 개인의 쾌락과 안일함을 우선하는 가치를 드러낸다. 영화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거듭 반복되는 이유는, 이런 현실이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속성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다. 이에 비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의 공간이다. 창세기가 전해주고 있듯이,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서 인간의 선택은 선악과였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기보다는 자신의 힘과 능력, 가치판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세상 속에서 언제나 이중적인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거룩성과 세속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도 자신의 힘과 능력에 따라 살아가려는 야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믿음에 의해 의인으로 약속받은 자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사는 한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세워진 교회가 당신의 통치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신다. 교회는 빛이요 소금이다. 세상 속의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 곧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서 편향됨이 없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사회공동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가치 혹은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정의를 밝혀야 할 과제 때문에 존재한다. 성령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과제를 갖고 있다. 힘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연약한 자에게서 능력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소망한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공권력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교회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일이다. 영화 속 교회 이미지 역시 언제나 부정적이라는 사실은 교회 역시 타락한 공권력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세상의 변혁을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변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에 충실한 삶에 기반을 둔 영향력을 높여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암5:24) 일이다. 교회가 먼저 자정의 능력을 입증해야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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