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소유가 아닌 관리의 대상이다"

최호윤 회계사 '돈에 대한 기독인들의 올바른 인식'

최호윤 회계사 승인 2012.03.19 16:27 의견 0

 
저는 학창시절 법대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었고, 지금은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늘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따르겠노라 고백해왔는데 어떤 일에서 큰 도전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회계사를 하다가 유학을 가려고 사직을 하고 6개월 동안 영어공부를 하면서 준비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제 생각에는 공부만 할게 아니라 외국계회사에 취직하면 영어공부도 하고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괜찮은 학교 법대를 졸업했고, 회계사 경력이 5년정도 되었기 때문에 저는 자신감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세군데의 외국계회사응시를 하게 되었는데, 왠걸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 습니다. 어디서도 저를 뽑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예전에 회계감사를 다닐 때 회사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런 곳에서도 저를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저의 자존심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유학 준비를 시작할 때 몇 개월을 버틸 자금을 미리 통장에 준비해놓았었는데, 통장 잔고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자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면서 마음속에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예전에 제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겠다고 한 고백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말씀을 들으면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지만, 실상에서 책상위의 청구서와 통장 잔고를 확인하게 되면 돈이 우리의 방패가 되기 쉽습니다. 왜 돈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없어지면 불안해질까요? 제가 내린 결론은 ‘돈이 있으면 내 맘대로 하면서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의 가장 큰 혜택은 내가 주인이 되어 돈이 주는 통제력과 안정감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두 가지 경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담은 창세기 3장 5절 말씀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는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부분입니다. 이 두 장면은 공동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우리의 신분에 대해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관리자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분명한 진리인데 사탄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포지션이 변화된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와 같은 시험을 늘 받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방민족을 무찌르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말씀은 등한시하고 기적과 이적만 바라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가 스스로 삶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게 되면 하나님은 내 삶의 장신구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역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자체가 돈에 대해서 하나님의 위치까지 생각할 위험이 높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누가 내 삶의 주인이냐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찾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은 늘 뒷전이 되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돈의 흐름을 짚어보면, 화폐 경제 이전에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고환하던 물물경제가 있었습니다. 물건 자체에 가치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 후에 금화, 은화 등 주화가 등장했는데, 금화도 금 자체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게 지폐로 바뀌고 보관과 소유가 편리해지면서 가치 저장의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종이 자체는 별 가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플라스틱 머니, 신용카드가 등장합니다. 돈이 가치 저장수단으로 바뀌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평가하고 부리는 도구로 올라갑니다. 사람도 돈이면 다 부릴 수 있게 되니 돈에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을 더 이상 한 공동체로 여기고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보험 제도를 살펴보면, 여러 사람이 매달 조금씩 모아서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돕자는 게 보험의 출발이었습니다. 누가 어려울 때 우리 공동체가 사랑의 힘으로 돕자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동차 보험을 넣고 무사고로 한해를 보내면 ‘내가 낸 보험료로 큰 사고를 당한 분들께 도움이 됐겠구나’ 하고 기뻐하기는 커녕 무척 아깝게 생각합니다.
다른 예로, 여러분은 재산을 누구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십니까. 자녀분들은 부모님 재산을 누가 상속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나눠주는 게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 것이라고 주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관리권을 주신 것이지 소유권을 주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청지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사역을 마칠 때에 누가 이어서 할지를 고민하고 여호수아에게 넘겨준 것과 같습니다. 누가 재산을 잘 관리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자녀가 잘 관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데 자녀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엉뚱하게 사용하는 겁니다. 자녀분들은 부모님의 상속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11장 8절 말씀을 보면 출애굽해서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은 당장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명령을 준행하고 율법을 지키며 살 때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돈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이 땅에 젖과 꿀이 흐르게 됩니다. 부모들이 생각 없이 유산을 물려주는 행위는 자녀들 스스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서는 길을 막아서는 행위입니다.

돈을 빌려주거나 받을 때도 이런 소유권이 작동합니다. 관리의 차원이라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되는데, 실제로는 ‘빌려줘도 되나, 돌려받을 수 있을까?’하고 갈등합니다. 빌리는 사람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처럼 최선을 다해서 빚을 갚아야 마땅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빚’은 ‘outstanding'으로 빚진 상태로 계속 가는 것을 말합니다. 빚질 수는 있지만 소비규모를 줄이지 않고 계속 빚진 상태로 있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차입금을 쓸 때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면 빚을 지면 안 됩니다. 첫째는 부채 부담으로 하나님보다 채주가 먼저 생각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는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서 돈을 우선시하여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영성의 건강성을 훼손하기 쉽고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는 말씀은 자칫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다 써버려야 할 것 같이 여겨집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옳을까요, 아니면 하루살이처럼 하나님께 의지하여 오늘을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은 십일조는 세금을 떼고 계산하느냐, 전체 수입에서 떼느냐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그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저축의 경우도, 목돈 모아서 갖고 있으면 걱정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10장 9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전대에 돈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2장 3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전대와 주머니와 검을 사라고 하십니다. 앞의 상황과 전혀 상반된 말씀입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이 갔을 때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한 제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통제력을 위임받아 관리할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뒤의 대답만을 선호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앞부분에서와 같은 제자들의 자세가 될 때, 뒷부분을 허락하십니다.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야 할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통제력을 가지도록 유혹합니다.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길 때, 우리의 주변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 본 기사는 새벽이슬교회에서 <돈에 대한 기독인들의 올바른 인식>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최호윤 회계사의 강의를 정리한 글입니다.

저작권자 ⓒ koaspora,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