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종교개혁을 한지 49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마다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할 때면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가운데 우리 교회가 정말 종교개혁 정신에 걸 맞는 교회인지를 돌아봅니다. 종교개혁의 3대 표어였던 오직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의 신앙이 온전히 지배를 받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말로만 개혁교회를 외치고, 삶에서는 전혀 개혁교회의 모습이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교회를 향해서는 성경적인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성경적 갱신을 적용하고 있었는지 물어봅니다.
종교 개혁은 494년 전에 일어났던 성경의 회복과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갱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더구나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 선배들의 가르침처럼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종교개혁이 현재진행형이라면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분명합니다.
종교개혁은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종교개혁을 이어가는 일입니다. 첫째 성경관의 회복이 더욱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신학운동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성경을 분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구나 성경을 전체의 관점에서 해석하여야 하는데 개별적으로 읽고 해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불일치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여러 종류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실수를 만들은 것입니다. 모 신학대의 신약교수는 지옥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피하고 교회 다닌다고 다 천국 가느냐는 질문을 하여야 한다는 동문서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개혁의 과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둘째 바른 신앙 고백의 회복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듯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실천적 무신론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는 오지만 종교인으로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귀에 달콤한 설교만을 골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 관련이 없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자신도 죽고, 교회도 죽이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고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에 따른 신앙생활이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설교 강단의 회복입니다. 개혁교회는 강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어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시장 통이 되어 집니다. 시장은 다양한 소리가 난무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소비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줌으로 상품을 팔아 버립니다. 여기에는 애통함이나, 회개함이 없습니다. 결국 회심의 기쁨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만족만 누리고 끝납니다. 이것이 교회의 강단이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 교회가 성장이라는 마수걸이에 걸려서 소비자중심 설교와 마케팅을 통한 인위적 변화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강단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귀를 간지럽게 해주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을 찢고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하며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과제중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성장의 포로에서 벗어나서 말씀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입니다.
넷째 말씀과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주의며 개혁파 신앙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균형 있는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지역을 위한 섬김의 사역이 함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불의한 정책에 대한 처방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지역의 문제를 잘 살피고 교회가 필요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교회 안에 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누구보다도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늘 고민이 되고 가슴이 아픈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힘써서 감당해야 할입니다.
다섯째 교회는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나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사회적 기득권세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회에서 복음의 영향력이 아니라 물리적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교회의 연합 행사가 있는 곳이며 어김없이 정치인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일을 즐거워합니다. 이제 이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돈은 권력을 움직이는 동인입니다. 돈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은 무서운 일도 가볍게 치루고 있습니다. 돈 인간의 삶에 필요하지만 사랑하기 시작하면 독이 됩니다.
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일은 복음의 영향력이지 기득권의 강화가 아닙니다. 너무 편하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참된 개혁이 있습니다.
여섯째 성경적 직분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만큼 직분이 많은 곳이 없습니다. 직분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위태로워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직분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직분은 결코 수직적이지 않습니다. 수평적이며 동역적입니다. 이러한 직분의 모습만 회복되어도 교회는 건강해 집니다. 물론 성경에 없는 직분은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임시로 세운 직분이 그 역할을 다 감당하였다면 점차적으로 없애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직분에 합당하지 않는 직분은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직분을 수여하는 일에는 정말로 조심하고 심도 있게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세워야 합니다. 특별히 사회적 조건으로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하고,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이로 세워야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일곱째 교회 재정의 투명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최근의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시험은 바로 재정문제입니다. 재정의 불투명으로 인하여 많은 교회가 지탄을 받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재정의 투명성은 상식적이지만 실제로 부끄러운 모습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재정의 투명성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 앞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 교회들이 재정을 월마다 보고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정직하게 자신들의 교회가 처하고 있는 재정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적어도 교회는 재정으로 인하여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기뻐하는 일이 넘쳐 날 때 교회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여덟째 기독교 윤리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윤리적이어야 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교회를 신뢰 할 수 있다는 교회 밖의 사람들은 17%로도 채 안 됩니다. 교회가 한국 사회의 부패에 동참하고 있다는 보고서도 있습니다. 실제로 각종 매체를 통하여 들려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은 우리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식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시대입니다. 멍하고 있을 그러한 시대가 아님을 봅니다. 기독교 윤리의 회복은 한국 교회의 중요한 개혁과제입니다. 그렇다고 소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먼저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아홉째 교회 성장주의를 포기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슬픔은 거룩한 교회를 세우기를 주저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가르침은 목회의 현장에서 쓰레기처럼 버리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신학과 목회가 분열된 현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러한 슬픔의 원인은 바로 교회 성장주의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성장한 교회의 목사가 되어야 영향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성장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물질적인 안락이 더하여 지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각 지역마다 천명이상 되는 교회의 목사들의 모임이 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그곳에 정치인들이 기웃거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문이길 바랍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는 자가 더하여 지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교회는 신학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키우기 위하여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영혼을 구원시키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큰 교회를 위한 달리기는 멈추어야 합니다. 칼빈은 자신이 시무하였던 제네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곳에 천국에 갈 사람은 10%로 밖에 안 되는 것 같다고 하면서 통곡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성장주의는 교회를 허무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난무합니다. 1년에 천만원이 넘는 설교 강좌도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교회 성장주의를 포기하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대형교회를 향한 로망에서 벗어나서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에 더욱 중요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참된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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