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단 한가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통해서 본 기독인의 윤리

서경미 승인 2011.11.03 20:48 의견 0

※ 이 기사는 영화 결말을 포함한 내용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영화사 진진

만약 매일 보는 뉴스가 극장에서 상영된다면 누가 부러 극장을 찾을까? 부부 갈등, 고부관계, 자녀 양육과 같은 가족 문제부터 계급, 종교, 젠더, 윤리 문제까지 아우르는 신문 사회면같은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처음 접했을 때 ‘이런 복잡한 영화를 굳이 봐야할까’ 하는 망설임이 들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배우나 화려한 경관, 달콤한 로맨스는 여기 없다. 대신, 말로 설명하기에 다소 복잡한 플롯을 사건에서 사건으로, 인물에서 인물로 정신과 시선을 옮기우는 장면들의 향연이 스크린 가득 펼쳐진다. 마치 스릴러나 추리물을 보는 것처럼 한 장면도 허비되지 않는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텔링도 영화의 완성도를 마지막까지 한껏 끌어올린다. 이 정도 솜씨의 뉴스라면 극장에서 볼 만 하겠다.

씨민은 계급과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란을 벗어나 자유로운 나라에서 외동딸 테르메를 교육시키고 싶어한다. 나데르는 좋은 남편이지만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까지 모셔갈 수 없다는 이유로 타협이 불가능하자 결국 두 사람은 별거에 이른다.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돌보며 답답한 이란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사는 삶을 딸 테르메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씨민은 무엇보다 싫었을 것이다. 남편 나데르의 아버지는 이제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알아본다’는 게 그의 궁색한 변명이다. 셀프 주유소에서 팁을 챙기자 차를 멈추고 딸에게 팁을 받아오게 할 정도로 원칙을 중시하는 이성주의자인 나데르는 아들의 책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여기서 관객은 누구의 편을 들 수 있을까. 아마 유교적 관념이 강한 사람이라면 나데르의 손을 살포시 들어줄 것이다.

   
이혼 조정에 나선 씨민(좌)과 나데르(우)가 앞으로 처하게 될 현실은 녹록치 않다
별거로 인해 혼자 아버지와 딸을 부양하게 된 나데르. 어렵게 구한 가정부 라지에는 직장을 잃은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다. 그러나 집과 일터의 거리는 너무 멀고, 깐깐한 나데르로부터 후한 품삯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이제 용변을 가리지도 못한다. 신심 깊은 라지에는 더럽혀진 환자의 몸을 씻겨야 하는 혐오감보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벗은 몸을 대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

사건은 이렇다.
어느 날 라지에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치매에 걸린 나데르의 아버지가 집을 빠져나가는 소동이 일어난다. 온 동네를 뒤져 아버지를 찾아내지만 가로막힌 도로 사이로 빽빽이 오가는 자동차들이 불길한 경적을 울린다. 다음 날, 라지에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돌아온 나데르는 아버지가 침대에 손이 묶인 채 쓰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분개한다. 게다가 라지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꼭 하루 품삯만큼의 돈이 사라졌다. 모든 정황이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에서 라지에가 지친모습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다그치는 나데르에게 라지에는 결백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흥분한 나데르의 귀에 들릴 리 없다. 결국 나데르에게 떠밀려 집밖으로 쫓겨나온 라지에는 난간에 부딪히며 계단에 쓰러진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유산 소식과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에 나데르는 또 한번 근심에 잠긴다.

인생에서 누구도 크게 잘못한 사람은 없다.
씨민은 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원했고, 나데르는 좋은 아들, 아버지, 남편으로서 있는 힘껏 살아왔다. 회교 국가에서 아이가 딸로 태어난 것도,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도 누구의 탓이 아니다. 라지에의 남편이 직장을 잃은 것도 따지고 보면 견고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 탓이다. 마침 임신을 한 라지에가 남편 몰래 돈벌이에 나선 것도 남편의 악화된 건강과 생계 때문이었다. 이제 관객은 라지에의 가련한 팔자에 동정심을 품게 된다.

근무시간동안 나데르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나데르의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집안일과 간병 모두를 해내기에 만삭의 임산부 라지에는 힘에 부친다. 나데르의 아버지가 집을 빠져나간 날, 그녀는 나데르의 아버지를 대신해 달려오는 차에 부딪혔고, 유산되었다. 다음날, 화가 난 나데르는 라지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잊고" 라지에를 계단 아래로 힘껏 밀친다. 이것이 팩트다.

나데르는 라지에가 임산부인줄 알고 있었다는 진실이 밝혀지면 직장을 잃게 되고 병든 아버지와 딸을 돌볼 수 없게 된다. 그는 반드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야하지만 그의 딸 테르메에게 원칙과 이성을 중시하고 윤리를 강조했던 아버지로서, 아이의 정직한 눈빛을 외면하기 어렵다. 정황상 라지에의 유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임산부에게 가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그는 테르메까지 자신의 거짓증언에 끌어들이게 된다.

   
라지에 "나는 코란에 대고 맹세할 수 없어요"
라지에는 자신이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 보수적인 남편과 종교적 신념 때문에 내내 곤혹을 치른다. 사건 중재에 나선 씨민의 도움으로 나데르로부터 합의금을 받을 수 있게 되지만, 그녀의 종교는 그녀의 양심을 괴롭힌다. 그 돈이면 당장의 궁핍함을 면할 수 있고, 남편의 치료비도 해결된다. 나데르 때문에 유산하지 않았음을 사실대로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괴로운 현실만이 고스란히 남을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합의를 하러 온 나데르는 마지막으로 라지에에게 ‘코란에 대고 진실임을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코란에 대고 맹세할 수 없어요. 나데르 때문에 유산한 게 아니에요." 끝내 그녀가 택한 것은 진실과 속죄였다. 그녀에게는 돈보다,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신앙이 더 중요했다.

잔인하게도 모두가 바라던 해피엔딩은 한 여인의 정직한 증언으로 인해 산산히 깨어진다. 나데르와 라지에가 씨민의 중재로 합의에 동의하면, 라지에는 당장의 생활고를 면하게 되고, 씨민과 나데르는 재결합의 빌미를 마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씨민과 나데르는 다시 이혼 법정에 선다. 어머니 씨민과 아버지 나데르에게는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낱낱이 그리고 묵묵히 지켜보던 그들의 딸 테르메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씨민과 나데르 중 누구와 살겠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테르메는 다문 입술을 연다. “저는 결정했어요. 지금 말해도 되나요?” 테르메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조용히 스크린 너머 숨죽인 관객들을 응시한다.

운명은 얄궂다. 좋은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 없다. 선한 의지가 선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운명 앞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자신이 원하는 인생으로 힘껏 내달렸던 두 사람, 씨민과 나데르는 영화 원제(A Seperation)처럼 완전히 갈려져 둘로 나뉜다. 그들은 사랑했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온전치 않은 사랑이었다. 더 사랑하기 위한 그들의 외로운 선택은 쓸쓸한 결말을 낳았다. 돈도 집도 건강도 지켰지만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상실했다.

한편, 라지에는 모든 것을 잃었다. 뱃속의 아이와 직장을 동시에 잃었고, 목전에 둔 거액의 합의금도 잃었다. 그렇게까지 지켜야했던 그녀의 굳은 신념은, 거짓과 불순종으로 인해 신의 진노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났다. 아둔해보이기까지하는 그녀의 맹목적 신앙은 그녀가 믿는 것처럼 신이 주는 평안을 담보하는 것일까. 혹은 오랜 종교문화에서 비롯된 관습적 집착 때문일까. 어쨋든 얼마간 그녀는 침상을 눈물로 적시겠지만, 매일 밤 신에게 기도할 수 있음에 안도할 것이다. 당면한 현실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했던 그녀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까.

   
테르메(오른쪽) "아빠, 정말 라지에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
테르메가 두려워한 것은 아버지 나데르가 감옥에 가거나 돈을 잃는 문제가 아니었다. 테르메는 ‘아빠. 정말 라지에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 하고 몇 번이나 고쳐 묻는다. 지금껏 인생의 올바른 좌표가 되어주었던 아버지가 눈앞의 현실에 잔뜩 주눅 들어 스스럼없이 거짓을 일삼는 모습은 테르메에게 가장 충격이자 비극적인 순간이다.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원칙을 고수하던 나데르는 아이의 눈앞에서 바로 그것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만 것이다. 어린 테르메가 깨달았던 그것을 씨민과 나데르는 못 보았던 것일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그 진리를 필사적으로 지키는 삶을 우리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잠시 살다갈 이 세상은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로 시시각각 우리를 위협한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잘못되지 않는다. 잘못된 인생은 하나님 없는 삶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고난을 피하는 삶이 아니다. 현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상의 방식에 편승하지 않는 것은, 오늘 내게 주신 분명한 하나님의 뜻 때문이다. 

진리(The Truth), 모든 문제는 결국 한가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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