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부터 약 5년 간, 한 청각장애학교에서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이 청각장애 아동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성폭행을 저질렀고, 학교 사람들은 이를 외면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건의 가해자와 책임자들이 대부분 처벌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도 교단에 선다는 것이다. 법조계의 솜방망이식 처벌과 언론의 무관심으로 인해 사건은 금방 잊혀졌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영화 ‘도가니’ 네이버 블로그)
흥분이나 감격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뜻의 ‘도가니’는 2005년 광주 인화학교사건을 소재로 한 공지영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교장과 교사가 장애 학생들을 성폭행 또는 성추행해 법정 구속됐던 사건은 공지영 작가에 의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5월까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1600만 클릭을 기록하며 연재되었고 같은 해 소설책으로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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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도가니" 사건기록일지ⓒ영화 <도가니> 네이버 블로그 |
2005년 11월 MBC PD수첩에 의해 사건이 크게 알려진 후,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결과 가해자는 6명, 피해자는 9명으로 드러났지만,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에서는 가해자 10명, 피해자 12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등을 선고받아 대부분 풀려났다.
현재 사회복지사업법상 재단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해 책임을 묻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복지법인을 운영하는 종교단체 등의 공익이사 선임 의무화 방안에 대한 반발과 이에 동조하는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학교재단이 피해학생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어떠한 사과도 없었다는 것이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원회의 주장이다. 학교는 오히려 사건 공소시효가 끝난 가해 교사들을 복직시키고 학교와 시설 명칭변경과 목적사업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마땅한 연고지가 없는 22명의 학생들이 기거하는 이 학교에는 지난 2010년도 학생들과 원생들 사이에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피해 학생들의 대부분은 대학 진학과 직장으로 진로를 정하였지만 장애로 인해 여전히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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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도가니>ⓒCJ E&M |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영화 ‘도가니’(감독 황동혁)는 개봉한지 6일 만인 28일 누적관객 125만 8291명을 기록했다.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원회 대표 김용목 목사(장애인복지단체 실로암사람들 대표)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와 소설의 한계가 있지만 사건의 실체적인 진실과 분명히 맞닿아있다”고 말하며 “영화를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잊혀져갈 뿐이지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해결되지 않은 사건과 잊혀진 진실에 대해 영화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영화의 배경인 무진시를 뒤덮은 뿌연 안개는 영화가 가야할 고단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를 암시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성모자애학원은 존경받는 교회 장로인 교장과 친인척들이 학교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성모자애학원의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위협적이거나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교장과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는 성치 못한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이 학교에 부임한 강인호 역시 무기력한 어른 중 한명이다. 아내를 잃은 뒤 병든 아이를 떠맡은 노모의 근심거리인 그는 학교와 교장의 비리를 알지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호가 가까스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때문이다. 인호는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인물이 아니라, 주변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는 연두가 있는 힘껏 내지른 괴성을 들었고, 유리가 이끄는 손에 붙들렸고, 멍 자국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는 민수를 외면하지 못했다.
인호 역을 맡은 배우 공유는 ‘히어로가 되고 싶어서 이 영화를 하는 게 아니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의 원대로 이 영화에 히어로는 없다. 영화와 현실이 닮아있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재판을 끌고 가는 것도 아이들이다. 불의한 세상과 이기적인 어른들로 인해 민수가 스스로 가해 교사를 심판할 때도 인호는 목격자로 남겨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민수의 영정을 끌어안은 인호의 절규는 관객의 가슴을 치지만, 정작 사건 해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에 장애아의 그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직면할 때가 있다. 정의가 승리하고 진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이제는 영화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고자 할 때, 작은 용기는 때로 큰 힘을 발휘한다. 개인이 사회를 이기는 것은 여전히 버겁지만, 진리를 지켜낸 한 사람의 희생은 삶의 궤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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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판결이 내려지자 재판장 안은 청각장애인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찼다ⓒCJ E&M |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공지영 작가는 이 한 줄의 신문기사를 보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시대를 향한 작가적 사명감은 잊혀진 사건을 다시 소생시켰다.
영화는 이 문장을 영상으로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마지막 판결문이 수화 통역을 거쳐 정확히 한 호흡 뒤에 터져 나오는 청각장애자들의 분노는 그 어떤 아우성보다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강자와 약자를 나누는 기준과 여기서 작동하는 시스템과 어떤 두꺼운 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황동규 감독은, 사회적 약자와 기득권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대비시킴으로서 관객의 분노와 공감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낸다.
부장판사 출신의 능력 있는 변호사가 휘두르는 권력에 굴복하는 검사, 교장 부인과의 친분으로 인해 진술을 번복하는 의사,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교육청과 시청, 사건을 방관하는 경찰 등 기득권층 모습이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실제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용목 목사는 소설에서 인호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인물(최요한 목사)로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을 삭제하는 대신 교회를 몰인정한 기득권층의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재판에 참석한 교인들은 성범죄에 회부된 장로(교장)를 신처럼 떠받드는 대신 피해를 당한 아이들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보여주지 않는다. 영향력 있는 교회 장로인 교장과 그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는 교인들의 모습은 최근 교계의 화두로 떠오른 한 대형교회 목회자를 둘러싼 논란을 연상시킨다.
피해자인 아이들을 돕는 것은 힘없는 교사 인호와 인권센터 간사로 박봉에 시달리는 서유진이다. 금치산자인 아들을 대신하여 손자의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 할머니의 남루한 모습은 그를 함부로 책망할 수 없게 한다.
최근 한국영화를 통해 묘사되는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모습은 다분히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교회는 세상의 비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부의 문제를 전체로 확대하여 반기독교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작금의 관행과 풍조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세상의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세리, 창기와 같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셨다. 오늘날 교회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교회가 따르지 않는 데 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 없이, 개인의 신앙만을 강조하는 잘못된 내세관이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권력의 자리로 내달리게 하고,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중은 사건을 잊었고 권력은 진실을 묻었다.
실제 사건의 가해자인 전 교장 김씨는 아무런 법적처벌을 받지 않은 채 몇 년 전 암으로 사망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에게 자신의 죄 많음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내가 용서 안했는데 누가 용서해요?"
할머니가 어린 자신을 대신해 가해자와 합의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터트린 민수의 마지막 말이다. 영화 '밀양'에서도 맹목적인 신앙으로 인한 잘못된 구원론을 믿는 가해자의 모습이 논란이 되었다. 이처럼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지만 여전히 내재하는 죄는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이 현실 기독교의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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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래, 인화학교 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 보상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원회 |
영화가 개봉되고 사건이 재조명되자, 각처에서 청원운동 등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사회복지사업법 재개정이 추진된다. 개정안에는 복지재단 투명성 확보 및 족벌경영 방지를 위한 회계-결산-후원금 상세보고 의무화, 공익이사 선임 등 법인 임원제도 개선, 불법행위 적발시 직무정지, 정부와 지자체의 관리 감독기능 강화 등의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네티즌들의 재수사 청원이 이어지자 28일 경찰청은 도가니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청은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들의 안전과 인권을 확보하고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특별수사팀을 꾸려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인 CJ E&M에 따르면 현재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영화를 15세 이상 관람가 버전을 만들어 재개봉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22일 개봉한 영화 도가니는 28일 현재 전국 472개 극장에서 상영 중이며, 전국 GGV 5개관 등 일부극장에서는 한글자막으로도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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