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게 감추어진 인본주의.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부활'

배성현 승인 2011.09.29 14:38 의견 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부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즉, 크리스천의 도덕은 결과론적인 것이죠. 따라서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도덕적인 삶을 전연 따르지 않는 자가 입술로만 구원을 외칠 때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도덕적 삶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우리가 흔히 ‘구원의 조건이 도덕은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시작이죠.

톨스토이의 중·후기 작품을 읽게 되면 우리는 흔히 그가 당연히 기독교인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작품이 시작하기 전, 먼저 나타나는 복음서의 말씀. 사랑이라는 주제. 게다가 신경질적인 도스토옙스키의 문체와는 달리 유려하면서도 경건해 보이는 그의 문체는 문제제기 할 여력마저 없애버리죠.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화려한 치장을 벗기고 중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도덕’입니다.

도덕이란 충분히 가치 있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 작품에 메스를 들이미는 것일까요? 그것은 잘못된 종교관을 바탕으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독론은 이단으로 정죄되기에 충분하며, 작품 곳곳에서 크리스천에 대해 비꼬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의 작품 중 한 부분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편의상 본문을 인용하는 과정 중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은 있습니다. 아주 쉽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우리의 벌을 자신의 고통으로 대신하여 흘리신 피입니다. 그분의 고통, 그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을 위해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께 속죄로 감사해야겠습니다. 그 성스러운 피야말로 우리의...”
네흘류도프는 더 이상 설교자의 말을 들을 수가 없어 눈썹을 찌푸리면서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홀 밖으로 걸어나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줄거리를 먼저 잠깐 말하자면, 여기서 언급되는 네흘류도프는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작가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순수한 청년이었으나, 군 복무를 하고난 후, 다른 러시아 귀족들처럼 방탕한 삶을 사는데, 어릴 적 순수하게 사랑했던 ‘카튜사’를 재판에서 마주하게 됩니다(카튜사는 죄인으로,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그가 방탕하게 지냈던 시절 카튜사를 농락했던 것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고 여태껏 잠재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수많은 도덕적 쟁점들을 수면위로 드러내며 귀족으로서의 편안한 삶과 스스로 인정하는 삶의 기치간의 갈등을 ‘도덕’이라는 관념을 통해 해결하며, 타락한 카튜사도 그 도덕의 힘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줄거리만 볼 때는 그저 개인의 도덕성을 일깨우는 소설이라고만 느낄 수 있겠지만(그리고 이 도덕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죠), 위의 장면으로 보아 우리는 이 작품을 그렇게 가볍게만 넘길 수 없습니다. 독자는 그를 통해 작가의 사상을 주입받게 되는데 그의 사상은 어떠합니까?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합니다. 그 말은 그를 한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존경할 수 있으나,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마태복음을 읽으며 기독교로 회귀하는 듯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는 전체적으로 수없이 기독교를 비판한 것에 비해 마지막 부분의 비중이 너무 적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는 단순히 스스로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이기 위해 복음서의 내용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앞서 그토록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데 열과 성을 다 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반드시 그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만 했죠. 마지막 장면은 그가 예수님의 신성은 부정하되, 도덕적인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는 것을 표명할 뿐입니다.

   
 
그는 수없이 인간의 도덕적인 모순을 직시합니다. 그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는 순간조차 그 동기가 결코 선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며, 선하다 하더라도 선하지 못한 타인에 대해서는 결코 선하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도덕을 통해 선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점점 선에 가까워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립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죠. 또한 ‘그 어떤 인간도 선할 수 없다’는 말을 확대해석하여 법정의 심판까지 부정하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게 되지요.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 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의 생각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덕적인 세상의 구현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하는 것이 스스로의 과업이라 주장하여 결국엔 모든 인간이 악하다는 전제에 결국은 모순을 빚게 되지요.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모두 악한 인간이지만, 서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조금이라도 더 선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세상에 낙원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진 것이겠구요.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쏟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했는지에 더 집중하여 그것을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할 뿐이지요. 그러하기에 성경 말씀도 전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본질보다는, 그의 주장이 얼마나 도덕적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셈인 것이죠.
결국 그가 말하는 부활이란 믿음을 통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그 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몇몇 본문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 이 모든 물음에 답을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도 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해낼 때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

-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그녀가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영혼에 크나큰 변화가 온 것이다. 이 변화로 하여 그는 그녀와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이 변화를 일으켜주신 하나님과도 연결된 것이다.

이 두 장면에서 톨스토이의 사상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는 그의 사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바로 이것,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교만에서 나타난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셈이죠.
저는 너무도 두렵습니다. 도처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너무도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말이죠. 우리도 알게 모르게 세상의 가치에 젖어있어, 참된 진리 안에 바로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을 통해서 저는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철저한 나의 부인입니다. 나를 의지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네흘류도프와 같은 인본주의의 오류에 빠져들게 되는 것임을 자각하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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