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는 성경에 뿌리를 둔 중요한 사상이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왕과 제사장의 역할 구분이 현대적인 의미의 정교분리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류 최초로 정교분리 사상을 최초로 헌법에 표시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1789년 미국 연방 헌법 제정 당시에는 이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았지만, 1791년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이라는 이름으로 제1조부터 제10조까지의 수정 조항을 추가하면서 정교분리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다. 수정 헌법 제1조는 “의회는 국교를 설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의회가 국교를 만들거나 특정 종교를 지지할 수 없고,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하며, 종교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은 헌법에 종교자유와 정교분리 원칙들을 명시했다. 따라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교분리 사상은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1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정교분리 사상은 본래 국가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근대 이후에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국가 또는 종교 단체의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면서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정교분리 사상이 악용되어 왔기에 오늘날 정교분리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한층 더 중요하게 되었다.
미국의 수정헌법에 정교분리 개념이 명시된 이유는 크게 5가지 이유 때문이다.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보호, 교회로부터의 국가의 보호, 국가 및 교회로부터 개인 양심의 자유 보호, 연방으로부터 주(州)의 보호, 강제적 종교 참여와 후원으로부터 사회 및 구성원 보호 등이다. 수정헌법이 추구한 이런 내용들은 미국 사회에서 불거진 부분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지향점이 지켜져 왔다.
그러나 1971년 연방 대법원 판사 휴고 블랙(Hugo Black)이 교구학교 학생의 통학버스 운임 상환에 대한 판결에서 연방 수정 헌법 제1조의 국교 설립 금지 조항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정교분리에 대한 해석도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대한 폴 마샬의 해석은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 사상에 대한 기독인들의 접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본래 미국의 수정헌법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를 명료하게 풀어나가는 데 거대한 진보였다. 그것은 ‘법 앞에 만민 평등’의 원칙을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그 조항은 정부가 다른 사회 집단에게 하듯이 어떤 종교 집단과 협력하거나 그들을 지원하는 것을 막고자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정부가 어떤 종교 집단을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정부가 공평 정대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종교적 색채를 표현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미국에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서, 그 조항은 이제 다른 종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서, 그 조항은 이제 다른 종교인들도 그리스도인과 같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구절로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지난 역사에서 이 접근법이 미국 사회를 유익한 쪽으로 이끌고 왔지만, 대법원 판사 휴고 블랙(Hugo Black)의 해석론 이후 수정헌법 제1조항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블랙 판사의 해석은 한 마디로 “정부는 어떤 한 종교 (또는) 모든 종교를 후원하는 법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헌법 해석론의 변화는 미국에 네 가지 위험스러운 경향을 몰고 왔다고 주장한다. 네 가지 위험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1,600여 년 정도 후퇴시켜 버렸다. 서구인들은 어떤 형태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항상 믿어 왔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이런 관념은 벌써 구약 성경에서부터 나온다. 그들이 투쟁하며 답을 얻으려고 했던 중심 질문은 교회와 국가 ‘각각의 적절한 역할’이 무엇인가였다.
블랙과 제퍼슨은 교회와 국가 각각의 역할을 분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리’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본말이 전도된 격이 되어 버렸다. 수정 헌법은 문제를 하나 더 만들려고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주려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블랙의 공식은 수정 헌법의 취지를 오히려 역으로 돌려 끝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블랙의 공식으로 말미암아 열린 넓은 문으로 교회와 국가에 대한 온갖 이론이 침투하게 되었다.
둘째, 블랙의 공식은 교회와 국가의 바른 관계를 지칭하는 말로서 ‘분리’를 해석하면서 정부가 종교와 전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나가 버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스운 것이다.
교회와 종교는 국가의 영토 안에서 그리고 국가의 법 안에서 활동한다. 국가와 종교가 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없다. 만일 관계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에 대해서도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정부는 필연적으로 영토 안의 모든 것과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교회와 종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수정 헌법이 보여주듯이, 문제는 국가와 종교가 서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다.
세 번째로, 만일 정부가 종교와 ‘관계’를 맺을 수 없거나 종교적인 일을 ‘추진’할 수 없다면, 종교는 정부가 이미 관계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야만 하는 결과가 생겨난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 종교가 정부의 문제에 대해서 일체 양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가 어떤 부분에 소매를 걷고 들어서면 종교는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한다. 현대 국가가 어떠한가? 거의 모든 부분에 손을 대고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종교란 것은 이제 제대로 존재할 여지가 줄어들고 삶의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다.
네 번째로, 이러한 접근법은 인생의 모든 것을 형성하는 것이 실은 종교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법원이 그러한 해석론을 가지고 지난 수십 년 간 제한을 가해 온 종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전통적인 고등 종교였다. 세속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새로운 우상 숭배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그런 구속이 가해지지 않았다. 궁극적인 결론은 정부는 ‘종교’를 지원할 수 없지만 ‘세속적’인 유사 종교는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71년의 레몬 대(對) 쿠츠만 판결에서, 법원은 모든 법은 ‘세속적인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갈 떼까지 간 것이다.
결국 전통적으로 전통 종교와 현대의 세속 이데올로기의 분쟁에서, 미국 정부라는 거대한 권력은 이데올로기 편에 섰다. 그들은 세속적인 사상을 선호하고 전통 종교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차별을 통해 미국인의 생활을 급속도록 세속화시키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윌리암 덜라스(William O. Douglas) 미 연방 대법원 판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신앙을 가진 이보다 무종교를 믿는 사람을 더 선호하는 위험 지경에 있다.” 포터 스튜어트(Potter Stewart) 판사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속주의라는 새로운 국교(國敎)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는 기독당의 재등장으로 인해 정교분리에 대한 각각의 해석이 다시 논쟁이 되고 있다. 문제는 정교분리 사상을 성경적,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논란에는 일반 언론까지 가세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정파적 입장에서 정교분리에 대한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현재 창당을 추진하는 기독자유민주당의 경우 강경한 보수우파적인 정당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보수언론들이 정교분리를 내세워 기독정당들이 헌법정신을 훼손한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정교분리에 올바른 해석이라기보다는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보수정당인 여권이 기독정당을 통해서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폴 마샬이 언급한 것처럼 정교분리 사상이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두 주체는 한 국가 앞에서 공존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교분리는 교회와 국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사무엘이 사울을 향해 나단이 다윗을 향해 왕의 불의한 행위를 지적하며 정의의 목소리를 내고, 솔로몬의 경우처럼 불의한 제사장의 권한을 왕이 나서서 제한한 것처럼, 정교분리 사상에 입각한 올바른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서로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교분리 사상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치참여에 앞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다.
*이 글은 폴 마샬의 [정의로운 정치]와 강휘원 평택대학교 교수의 논문 [미국의 정교분리 사상]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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