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이 아니라 ‘헌법’, ‘복종’이 아니라 ‘언약’

근대국가의 세속적 주권론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

이은창 승인 2011.08.31 19:43 의견 0

제4회 기독소장연구자 컨퍼런스가 ‘기독교와 주권’이라는 주제로 8월 25일 청어람에서 열렸다. 종합토론에서 발제자로 나선 한동대 이국운 교수는 근대국가의 세속적 주권론은 타자의 얼굴의 호소를 받아들이기보다는 타자의 얼굴을 없애버리는 선택을 강조했다고 비판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성경의 ‘언약신학’을 기반으로 한 헌법의 논리가 주권의 사상을 대신함으로 공존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 대안임을 주장했다. 발제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권은 더 높은 권력이 없는 최고의 권력으로 논리적으로 국민이나 영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국민이란 주권의 인적 효력범위이며 영토는 주권의 공간적 효력범위이기 때문이다. 이 주권은 오늘날 정치 영역에서 자기보존의 욕망에 기초하여 아주 적나라하게 타자의 얼굴을 없애버리는 핵심적인 이론적 도구가 되고 있으며, 헌법은 주권에 복속하는 동일자의 세계에 국한되고 있다.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면 주권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권이라는 개념은 장 보댕이라는 프랑스 이론가에 의해 최초로 제안되었다. 영국이 종교전쟁으로 혼란을 겪던 시대보다 50년이나 앞서 프랑스와 유럽은 가톨릭과 위그노의 종교전쟁이 심각했다. 유럽대륙 전체가 거의 내전상태였다. 주권이란 개념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보댕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 개념을 세속화할 것을 제안한다. 주권이란 신의 개념을 인간의 정치공동체에다가 써 보자는 거다.

 장 보댕

주권의 개념표지는 두 가지다. 첫째, 주권의 최고 개념은 권력이다. 둘째, 주권은 독립적 권력이다. 보댕은 이 두 가지 개념표지를 이용하면 종교적 내전상태를 끝내고 평화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주권이 최고의 권력이므로 각자의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주권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질서가 확보될 수 있다. 둘째, 주권은 독립적 권력이므로 주권들 사이에서도 독립에 기초한 평등이 확보될 수 있다. 장 보댕이 제안한 이 새로운 주권개념은 이후 급속도록 퍼져서 놀랄 만한 정치적 혁신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주권 개념은 최고성과 독립성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없이 주권개념의 운영책임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이후 서구 근대정치사상에서 주권이론의 전개과정은 주권자의 교체 또는 확대과정일 뿐이다. 의회주권론-인민주권론-계급주권론-국가주권론-국민주권론. 이 과정에서 주권을 묻지 않고 주권자만 묻고 있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최고성과 독립성을 내세운 주권국가의 논리는 정치적 현실이 되어 버린다. 최고성과 독립성은 아무런 논리적 연관 없이 실용적으로 구사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국제법 이론이다. 국제법의 주체는 주권을 가진 국가이고, 그 주권국가들 사이는 크기나 인구 숫자, 세력 등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취급된다. 보댕 이전의 신학적 주권론이 최고이며 독립인 유일신의 신적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보댕 이후의 세속적 주권론은 신적 주권을 분할하여 주권을 가진 세속적 영토국가들에게 분배한 것이다. 보댕이 시작한 주권개념의 세속화는 최고이며 독립인 히브리적 유일신을 부인하고 그 자리에 마치 그리스나 로마의 신들처럼 복수로 존재하는 세속적 주권국가들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주권에 대한 이런 변화가 타자의 얼굴을 없애려는 유혹과 관련해 자기사랑과 동일자중심주의를 심화시켰다. 보댕의 새로운 주권개념 속에서 두 종류의 동일화와 배제가 체계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각각의 주권국가는 주권에의 복종을 고리로 동일화를 추진한다. 주권에 복종하지 않으면 배제될 수밖에 없다. 유럽공법은 이 동일화와 배제의 경계선을 공간의 경계, 특히 토지의 경계에서 찾았다. 주권국가는 영토국가이고, 국민이란 기본적으로 그 영토에 살면서 주권에 복종하는 사람들이라는 현재의 상식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버려진 땅에 살거나 영토에서 쫓겨나거나, 영토에 살아도 주권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겐 이제 ‘주권에 복속하여 국민이 되거나 아니면 떠나가거나’의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된 것이다.

둘째, 주권국가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일화를 추진한다. 왜냐하면 이제 세계는 주권국가와 그 바깥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주권국가들은 자기들을 문명이며 진보라고 인식합니다. 유럽에서 종교전쟁을 마무리한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서구의 국제기구들은 모두 이런 생각을 밑에 깔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주권국가가 아닌 정치공동체들이나 주권국가 바깥에 사는 사람들은 주권국가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렇게 배제되어 식민 지배를 당한 정치공동체들이 자신들도 주권국가들의 리그에 가입해 다른 정치공동체나 그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식민 지배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지난 400년간 세계는 주권국가의 논리와 관련해 끊임없는 전쟁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동대 이국운 교수ⓒ더보이스 이은창

따라서 나는 장 보댕에서부터 시작된 세속적 주권론을 반대한다. 장 보댕에서 토마스 홉스를 잇는 시기 동안 이 두 정치이론가가 내세운 주권 및 복종의 논리를 거부하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타자와 공존’이라는 지독히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주목하는 이들은 종교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일군의 프로테스탄트들이다.

프로테스탄트들 내부에서 내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종교전쟁은 기본적으로 성경적 계시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와 보편교회의 가치를 신봉하는 가톨릭 사이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서로 죽고 죽이면서도 거룩한 전쟁으로 각자를 정당화할만한 근거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들 내부에서 패가 갈리고 내전이 발생하자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장면이 펼쳐진다. 학살과 증오 그리고 복수의 광기기는 대살육전을 낳게 된다. 문제는 서로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거룩한 전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쉽게 끝날 수가 없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참혹한 ‘절대 vs 절대’의 살육전이 몸서리칠 만큼 계속된 뒤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는 한 가지 현상이다. 습관처럼 상대방을 죽이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니라 나도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말이다.

이 프로테스탄트들은 장 보댕의 세속적 주권론이나 토마스 홉스의 복종계약이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해결책들은 신적 개념인 주권을 전면적으로 세속화시킨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내전을 계속할 것인가? 동족상잔의 살육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프로테스탄트들은 성경 안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정치적 기획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오직 성경’의 신조가 이렇게 작동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개념이 언약(言約, covenant)이다. 구약성경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전개된다. 언약의 체결-언약의 배반-언약의 갱신……. 이런 식이다. 언약을 체결할 때 이스라엘 야훼 앞에서 하나가 된다. 죄를 회개하고 서로의 경계를 정하고 서로를 신뢰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헌데 시간이 지나 그 언약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운 세대의 리더들은 언약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은 갈라져서 서로를 헐뜯고 죽이게 된다. 야훼의 징벌은 피할 수 없다. 징벌 끝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야훼 앞에 모인다. 언약의 갱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언약’이라는 개념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들 내부의 내전상황을 해결하는데 이론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망을 제공해 주었다. 갈라져서 서로를 헐뜯고 죽이는 그들 자신의 모습은 신 앞에서 맺은 언약이 깨어졌다는 증거였으며, 그 언약을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청이었다. 영국사에서 청교도 혁명을 겪고 난 뒤부터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 급속하게 부각된 것은 한편으로 프로테스탄트들 내부에서 언약신학이 발전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언약신학’은 장 보댕의 세속적 주권론이나 토마스 홉스의 복종계약이론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 언약신학은 공동체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주권론이나 복종계약은 언제나 살육이 벌어지는 현장의 바깥에다가 시선을 정초하고 질서를 기획한다. 이처럼 공동체 바깥에서 사유하기 위하여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최고성과 독립성을 지닌 ‘주권’의 개념이다. 이에 비하여 언약신학은 근본적으로 주권을 인간의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가에 관하여 회의적이다. 오히려 주권은 여전히 신에게 있으며, 신 앞에서 맺은 언약에 의하여 그 행사가 위임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주권보다 주권의 행사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당연히 시선은 공동체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주어지게 된다. 이처럼 언약신학은 주권의 문제를 신 앞에서 해결한 뒤, 살육이 벌어지는 현장 속에서, 그 내부에서 평화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언약신학은 ‘절대’(the absolute)가 아니라 ‘초월’(the transcendent)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수없이 분열하는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의 일치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겠는가? 언약신학은 주권의 개념과 연결된 ‘절대’의 사상 대신 ‘초월’의 사상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종교를 초월의 차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청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국교를 금지한다는 헌법원칙은 이와 같은 사상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이제 종교는 ‘거룩’(the holy)의 차원으로 한없이 물러가면서 인간들 사이의 저 깨지기 쉬운, 지독히도 어려운 잠정적 평화를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헌법의 논리는 주권의 사상과는 다른 세계관의 기초를 가지고 시작된다.

앞에서 세속적 주권론을 최고성과 독립성이라는 불명료한 개념표지들에 기초하여 ‘금을 긋고’ 그 바깥으로 타자를 내어 쫓는 논리라고 말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타자에 대하여 같음을 선포하고 다름을 찾는 논리라고 볼 수 있다. 너와 나는 같다고 전제한 다음에 상대방이 나와 다른 점을 찾는 것이다. 주권의 논리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같음의 논리 또는 같음을 전제로 다름을 무력화시키려는 논리다.

이에 비하여 헌법의 논리는 다름을 먼저 전제하는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고 해 놓고 그 다음에 너와 내가 같은 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다르다고 전제한 뒤에 찾아보아도 예상보다 같은 점이 많다는 거다. 종교전쟁에 휩싸였던 사람들이 함께 공통된 신앙고백을 만들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이 감정이다. 둘째는 이렇게 같은 점을 찾아내서 연대를 만들면, 점점 더 많은 같은 점을 찾아내서 더 튼튼한 연대를 만들려는 관성이 생기게 된다. 셋째는 그렇게 많은 같음을 확보한 뒤에도 상대방이 여전히 다름으로 남아있게 된다는 거다.

같음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름에서 출발해서도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주권의 논리와 구분되는 헌법의 논리의 고유한 국면이다. 같음을 모으고 다름을 내쫓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동일자를 지키고 타자를 죽이기보다는, 오히려 타자를 비밀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계시된 것 가운데서 같음 곧 공존의 근거를 확보하겠다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서 삶을 통해 같음의 두께를 늘려가겠다는 것, 헌법의 논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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