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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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7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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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의 양면성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브래드 퍼만, 2011, 15세)
영화는 마이클 코넬리의 동명의 법정 스릴러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의 상당 부분이 주인공 할러의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그를 아는 것은 영화 이해의 단서이다. 영화에서는 몇 개의 이미지만으로 단순화시켰지만, 제목에 나타난 바에 따라 요약해본다면,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의전용으로 사용했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신을 과시하고 또 정의보다는 돈만을 위해 일하는 속물 변호사다.
내용은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에 착안하여 전개된다. 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자를 변호하게 된 할러는 의뢰인이 사실은 악마와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된 후 변호사로서 지켜야 할 ‘비밀유지의무’로 인해 딜레마에 빠진다. 만일 도중에 포기한다면 변호사 이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범죄 행위를 무죄로 처리하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긴장감을 자아내며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데, 장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구조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어차피 정의보다 돈을 위해 일한다는 이미지로 포장된 사람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옭아매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을까? 그는 과연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이 발동한 것인지, 아니면 악마 같은 의뢰인을 대하면서 일말의 양심이 되살아난 것인지를 알만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영화의 의미와 관련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딜레마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장르적인 재미를 주지만, 사실 이 영화는 법이라는 제도의 양면성을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러는 누구보다도 법으로 인해 죄 없는 자가 유죄로 판단되고, 또 범인이 혐의를 벗는 것 역시 법의 논리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형사법 전문가였다. 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존재로서 할러라는 캐릭터 자체는 법의 양면성을 구현한다.
우리 사회에서 ‘검찰 스폰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일이지만, 사회적 정의를 세우고 또 실현하는 법철학적인 의미에서의 법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듯이 보인다. 정의는 이상과 달리 실제적으로는 임의적인 것일 뿐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삶의 현실에서 뼈저리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실제로 법과 연루된 경험이 있는 사람 중 일부는 소위 “빽”이 없어서 당하는 설움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법이 해석의 논리와 논증의 설득력에 좌우되다보니, 법은 결국 해석의 주체인 권력과 자본의 힘에 제압될 뿐이다. 정의를 정의하는 것은 권력과 자본의 힘인 듯이 보인다. 많은 정치인들은 자기들에게 유익이 돌아가지 않는 법안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궤변으로 여겨지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관예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올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제외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한편,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규정되는 정의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권리를 누가 보호해줄 것이며, 진정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 것인가? 교회는 공적인 존재로서 법적인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과제를 가진다. 동시에 법적인 정의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도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또 그래야하기 때문이다. 법과 관련해서 해석과 논리에 좌우되지 않고 진실의 편에 설 수 용기가 발휘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다. 소망하는 자로서 소망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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