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개혁이냐 문화 창조냐

최성수 편집위원 승인 2011.06.20 15:02 의견 0

문화 개혁이냐 문화 창조냐 

  기독교가 문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나 개념을 든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발견한 통계적 수치에 따르면 단연코 “개혁” 혹은 “변혁”이고, 그 뒤를 잇는 것은 “창조”이다.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개혁(reformation)을 말한다면, 변혁(transformation)은 형태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개혁은 점진적인 변화를 말한다면,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변혁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양자를 차별화시키기도 한다. 물론 혁명(revolution)은 이들과는 또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제자리로 다시(re) 돌아온다(volvere)는 뜻을 가진 것이지만, 16-17세기로 넘어오면서 이 말의 의미는 위치가 ‘바뀐다’ 혹은 ‘뒤집힌다’라는 뜻으로 전이되었다. 다시 말해서 Revolution(혁명)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급격한 정치적 지형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주로 정치에서 많이 사용되었지만,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의미에서 과학이나 문화 분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은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과거를 지배했던 패러다임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16세기 문화혁명”이라는 제목의 책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은 16세기의 문화의 변화에 기반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단지 주어진 패러다임 안에서의 변화 혹은 점진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과 변혁과는 달리, ‘혁명’은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를 지향하는 개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변화의 정도와 속도의 차이를 환기시키거나, 혹은 변화의 차원를 시사해주고 있지만, 일상 언어적 관행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다. 쉽게 말해서 기존의 것을 뜯어 고치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선거철이 될 때마다 유행하는 이정현의 “바꿔”는 원래 남녀간의 사랑에서 큰 불신을 경험했던 사람의 분노가 담겨진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 것이지만, 이것이 정치의 변화를 혹은 정권의 변화를 패러디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만큼 바꾼다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여하튼 ‘개혁’(혹은 변혁)이 문화의 화두에서 으뜸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세계관적인 성찰의 영향에서 비롯되리라 생각된다.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은 현대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에까지 깊숙이 침투되어 있어서 개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교회의 삶과 정신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자각한 결과이다.

  ‘문화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삶의 양식이 고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음식문화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경우, 문화를 개혁한다 함은 음식을 만드는 방식이나 음식의 내용, 혹은  음식과 관련된 환경까지도 비판적으로 재고해서 버리거나 혹은 그것을 일정한 의미와 방향에 맞게 고치는 일이다. 따라서 문화 개혁을 위한 시도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판을 전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것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 개혁은 곧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런 이유로 문화 개혁이라는 의미에서 추구된 다양한 문화운동은 성공을 보장받을 수가 없었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가도 이내 좌절하여 돌아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이런 결과와 관련해서 단지 기성세대 혹은 문화적 보수주의를 탓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문화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그들의 저항은 의미 있는 일이고 또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란 생명 현상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생명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 개혁’ 혹은 ‘문화 변혁’보다는 오히려 ‘문화 창조(culture making)’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앤디 크라우치가 주장하여 주목을 받게 된 이 개념은 사실 필자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내용이기도 했다. 문화사를 살펴보면 문화에 있어서 변화는 기존의 문화를 뒤집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면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다섯 번째 유형으로 제시하여 오늘 전 세계 기독교의 문화적 과제로 인식되어진 문화변혁은 비판적인 의미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한 이론적 패러다임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과 간과되어서도 안되고 또한 병행되어야 할 것은 문화 창조와 재생산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 인재를 양성하고 콘텐츠 개발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문화 목회는 성도들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며, 문화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또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를 통해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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