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영성

최성수 편집위원 승인 2011.06.18 08:28 의견 0

고무줄 영성

 

 

 

‘고무줄 몸무게’란 체중의 증가와 감량의 변화가 마치 고무줄과 같다는 것을 일컫는다. 주위의 환경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카멜레온을 떠올리게 한다. ‘고무줄 몸무게’로 연상되는 사람은 영화배우 설경구다. 그는 ‘오아시스’와 ‘실미도’를 찍을 때 야윈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하루에 6시간 이상씩 걸었다고 하고, 역도산의 생애를 담은 영화촬영을 위해서는 몸무게를 94Kg으로 늘렸다고 한다. 거의 20Kg 이상을 늘렸고, 그 결과 ‘실미도’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설경구’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어떠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설경구의 ‘고무줄 몸무게’는 그의 프로정신을 상징한다. 단순히 연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영화에 집중하고 또 영화에 필요한 인물로 스스로 거듭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무줄 몸무게’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강한 프로정신과 목표의식에 바탕을 둔 탄력성 있는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역시 영화배우로서 이름이 날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프로정신에 충실하다는 것은 임무 수행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위해서는 전천후를 대비하여 미리부터 준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임무 수행은 오직 한 가지 조건 속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기치 않은 돌발적이고 다양한 사태나 상황을 예상하여 그것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분야의 프로들은 전천후 훈련을 통해서 탄력성 있는 임무수행능력을 배양한다.

 

 

기독인이 이 땅에서 살면서 수행해야 할 임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기독인의 임무수행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의 행위를 인식하고 표현하고 또한 실천하는 능력인 영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어도 다양한 방식의 신앙의 모습과 삶이 나타나는 것은 영성에도 다양한 색깔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양한 영성으로 다양한 사역이 가능해지기 때문이고, 또한 다양한 영성을 확인하는 것은 서로간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할 수 있기 위한 기본 훈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관계를 형성할 때 신축성 있는 모습을 갖기를 원한다면 다양한 영성의 존재를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신축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천후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부한 곳에 처할 줄도 알고, 또한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영성은 인간관계를 이해하고 지도하는 데 있어서도 그 뛰어남을 발휘했는데, 고린도 교회의 분란을 지켜보며 쓴 편지 속에서 바울은 서로의 다름이 ‘은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또한 공동체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는 한 몸에 비유함으로써 성도들은 자신의 온전한 존재와 기능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며 서로에 대해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환기시켰다. 진단에 대한 그의 처방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관용의 뿌리를 바울의 고무줄과 같은 영성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고 프로정신 속에서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서 신학은 교회가 신축성 있는 몸을 만들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또 훈련시켜야 한다. 다양한 영성을 인정하고 또 계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성은 성령의 임재나 사역의 결과로 형성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거나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양한 영성은 하나님의 다양한 행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로 인해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영성에는 지성주의적 영성이 있는가 하면, 예술적 영성이 있고, 언어적 영성이 있는가 하면 성례전적 영성도 있다. 실천적인 영성이 있는가 하면 또한 이론적인 영성이 있다. 찬양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기도의 영성이 있다. 보냄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머무름이 영성도 있다. 이런 차이와 다양성을 무시하고 목회에서나 신학에서 오직 한 가지 영성만을 고집하는 가운데 관용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요구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의 요구에도 부응할 수 없게 된다. 신학과 교회 문제의 상당수는 영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제왕적 목회 스타일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목회자의 영성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목회의 제왕적 스타일은 결국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를 전 교회사역 가운데서 인식하고 또 표현하고 그 행위를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탄력성 있는 교회 운영과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행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고무줄 영성’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것을 간과하게 될 경우에는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할 경우 당황하게 될 것이며, 또 교회에 제기되는 각종 문제들 앞에서 속수무책이 된다.

 

설경구가 출연했던 ‘실미도’를 보며 느낀 것이었지만, 필요한 전투력을 갖추기 위해 실미도 병사들은 각종 고된 훈련을 거쳐야 했고, 또 김일성의 목을 따올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고도의 전투 기술을 습득하고 또 다양한 상황에서 전개될 수 있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몸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성공적인 임무수행도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미도 사태가 일어나게 된 중요한 이유는 당시 정치인들의 자의적인 행태에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실미도 병사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훈련된 인간 병기들이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전혀 사용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무줄 영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축성 있는 영성을 개발하게 될 경우 다양한 하나님의 행위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잠언은 세상의 일은 각 그 적당한 때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란 때를 바로 분별하는 자이며, 때를 바로 파악해서 기도할 때는 기도하고, 찬송할 때는 찬송하고, 말씀을 선포할 때는 말씀을 선포한다. 세상에 대해서 뱀같이 지혜 있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가 ‘고무줄 영성’을 갖고 프로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의 장소에서 멀티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다양한 영성을 계발하기 위한 신학수업에 매진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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