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남북관계와 교회의 과제

최성수 편집위원 승인 2011.06.18 07:59 의견 0
 
1. 영화의 공적 의미
영화는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구체적인 현실을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재현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보게 하며,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은폐되어 있는 부조리함을 드러냄으로써 공적 책임을 환기시켜준다. 특별히 복음이 결코 교회 안에 밀폐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은 이미 예수님 시대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복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을 깨닫고 교회의 공적인 책임을 고민하게 된 것은-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문화사역과 복지사역, 그리고 정치적 참여 등은 교회의 공적 책임감을 자각한 까닭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교회가 영화에 관심을 갖는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영화에게서 이런 공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예술 감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현실과 타자들에게 주목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적인 관심에서 볼 때 시급한 과제는 긴장된 남북관계다. 정권이 바뀌면서 더욱 경직된 남북관계는 군사적인 도발행위로까지 이어질 정도가 되었고, 더욱 위협적인 공격에 대한 경고가 계속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할 일이 있겠지만, 교회가 인지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교회의 역할과 과제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출발점은, 단순히 일련의 도발적인 사건들에 대한 임기응변적인 반응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교회는 궁극적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 영화 속 남북관계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 대부분은 남북의 이념적 갈등과 그것의 비극적인 결과를 성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긴장 상황을 보는 시각들의 변화나 새로운 시도들은 멈추지 않고 있다. 과거 이승만 정권시절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반공영화’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만큼 남북관계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북한을 생각하는 관점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1999년에 개봉된 <쉬리>(강제규)이다. 비록 ‘국민의 정부’ 시대에 개봉되었지만 이전부터 시작된 남북관계에 대한 시각이 바뀐 결과로 보아야 한다.
영화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스토리텔링 방식에 있어서 여전히 진부하다고 느낄 정도라는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서술 구조 때문이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도입-코믹한 장면으로 긴장이 완화되고-이념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며 극도의 갈등국면으로 들어가고-결국엔 비극적인 마무리’ 등이다. 한국영화가 이런 방식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아직까지, 아니 더욱 경직되어가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비극이 아닌 다른 방식의 결말을 가진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을 배경으로 하는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1999) 에서 보여주었던 역설적인 기쁨의 표현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념적 갈등과 동포애 사이를 오가며 겪을 수밖에 없는 한반도의 비극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비록 한결같다고 해도, 그것들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쉬리>는 한국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의 긴장관계가 오늘날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는데, 남녀의 사랑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관계의 비극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느껴볼 수 있는, 즉 전쟁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이념적 갈등을 제시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전후시대에 팽팽한 긴장이 현존하는 남북 접전 지역에서 남한의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진정한 형제애를 가로막는 남북의 이념적 갈등과 체제를 고착화하려는 노력들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표현해주었다.
<간첩 리철진>(장진, 1999)은 괴물 같은 이미지로 가득했던 간첩의 이미지를 바꾸어주는 데에 크게 기여한 영화다. 인간으로서 간첩의 고뇌와 고통을 그려놓고 있어서 간첩의 휴머니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전후세대들에게 주입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낯설게 여겨질 뿐인 한국전쟁의 실상을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전후세대들이 매우 강렬하게 느껴볼 수 있을 정도로 리얼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으며 천만관객 이상을 동원했던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는 한 형제에게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상황전개를 통해 한국전쟁의 진정한 비극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남북의 긴장을 고착화시킨 한국전쟁의 상황을 결코 이념적인 차이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주었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시각을 드러낸 영화는 아마도 <웰컴투 동막골>(박광현, 2005)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쟁의 상황 속에서도, 아니 적들이 함께 모여 있는 산골의 한 마을에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제시해주었는데,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의 일면을 보는 듯 했다. 이 영화 역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아니 서로에게 적이었던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의 순박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동막골’은 이념을 초월한 하나의 가상적인 공간으로서 그야말로 유토피아에 불과했지만, 동막골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이상처럼 여겨졌다.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분열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모든 갈등이 극복되는 사실을 결코 영화적인 상상력에만 머물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동막골’은 우리 모두가 꿈꾸고 염원해 왔던 순수함과 평화가 머무는 곳을 상징했다. 따라서 단순한 상상을 넘어 동막골은 실제의 세계가 되어야 했고, 수많은 교회나 단체들은 이를 패러디해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공동체의 이상으로 삼기도 했다.
<의형제>(장훈, 2010)는 남북문제를 다룬 다른 어떤 영화에 비해 해피 엔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도 조명하고 있어서 대한민국 사회의 그늘에서 타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기도 한데, 사실 아직까지 매듭이 풀어지지 않고 있는 남북의 갈등상황에서 해피엔딩을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해피엔딩을 제시한 것은 현 정권에 의해 더욱 긴장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문제에 있어서 다소간의 희망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전후세대들에게 남북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로 인간애를 제시하고 있고, 또한 남북의 갈등을 더 이상 이념의 차이에로 소급시킬 필요가 없음을 역설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 곧 삶임을 강조한다.
MB 정권의 분위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반공영화가 다시 재현된 것 같은 의심을 자아냈던 영화 <포화 속으로>(이재한, 2010)는 비록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이긴 하지만 남북의 갈등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다기보다는 당시 포항에서 학도병으로 싸웠던 71명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더욱 큰 비중을 두었던 영화다. 만들어진 시기로 인해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포인트는 당시 학도병들의 희생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은 <디어 평양>(2007)과 <굿바이 평양>(2009)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재일동포이면서 평양에 세 오빠의 가족을 두고 있는 감독의 두 작품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내용을 영상에 담고 있기 때문에 북한주민의 삶의 실상과 단면을 더욱 잘 엿볼 수 있다. 세 오빠를 북한으로 보내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디어 평양>과는 달리 후속편으로 만들어진 <굿바이 평양>은 첫째 오빠의 딸인 조카 선화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녀의 성장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리고 그녀가 대학에 입학해서 영어로 편지를 쓴 것을 소개함으로써 북한 사회의 희망을, 어쩌면 북한의 미래에 대한 감독의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감독은 2007년에 개봉된 <디어 평양>으로 인해 북한의 감시를 받게 되어 더 이상 방북의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그래서 <굿바이 평양>은 아쉽게도 2007년까지의 기록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감독은 자신의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간접적으로 평양 시민의 일상과 그 삶의 배경을 조명하고 있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밝은 비전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서 세 아들을 당시 재일동포에게 많은 후원을 해주었던 북한으로 보냈던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관객은 오늘날 북한 현실의 절망과 소망에 대한 안타까움을 함께 공감할 수 있다.
한편, 최근의 남북관계는 군사적 혹은 정치적인 긴장관계보다는 오히려 탈북자 문제 안에서 다뤄지는 경향이 강하다. 문제를 보는 관점의 변화 때문인데, 탈북자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우리 사회에서 타자로서 살고 있는 탈북자들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국가 이기주의에 따른 탈북자에 대한배타적인 태도를 소재로 다룬 <태풍>(곽경택, 2005)이 있다. 이 영화는 중국정부와의 외교적인 관계 때문에 한국정부에 의해 외면당했던 탈북자가 한국정부를 향해 복수를 계획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은 동포로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배척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대화시킨 것인데, ‘탈북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다. <국경의 남쪽>(안판석, 2006)은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그 아픔을 보여주고, <크로싱>(김태균, 2008)은 북한주민의 일상과 탈북의 동기, 탈북과정에서 일어나는 오해와 편견, 그리고 결과로서 나타나는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률 감독의 <두만강>(2009)은 비록 남한이 아니라 옌볜 조선족 자치주와 북한 함경도를 사이에 둔 두만강변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탈북자의 실상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남한에서 겪는 것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특별히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계가 그렇다. 그러므로 탈북자를 보는 우리의 시각에서 영화를 이해해도 결코 지나친 일은 아니다. 특별히 이 영화는 탈북자로 인해 받는 마을 사람들의 수난과 고통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탈북자들이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왜 타자로서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주는데, 두 소년의 우정을 통해, 특히 마지막 조선족 소년인 창호의 의미있는 선택을 통해 감독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들을 이웃으로 두기를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이유 역시 이 영화를 통해서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프로젝트로 기획하여 제작된 옴니버스 영화 <시선 너머> 안에 있는 <이빨 두 개>(강이관, 2011)는 남한 사회에서 타자일 수밖에 없는 탈북자 가족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남한 사람들과 탈북자에 대한 그들의 왜곡된 시선과 편향된 시선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탈북자의 현실에 대해 가장 충격적인 영화는 아마도 <무산일기>(박정범, 2011)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이창동, 2010)에서 조감독으로도 활동했던 이력에서 엿볼 수 있듯이, 박정범 감독은 사실주의적인 영상미학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엔딩 크레딧에서 소개되어 있듯이, 지금은 고인이 된 전승철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탈북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해서 이제는 형사로서 살면서 탈북자들을 돕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탈북자들의 밀입국을 돕는다는 미명하에 거짓말을 일삼고 또 사기를 치는 탈북자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이들과 함께 혹은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공 승철이처럼 남한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고독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남한사람은 물론이고 같은 탈북자에게도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유형도 있다. 탈북자들의 삶 주변에서 벌어지는 남한사람들의 이중적이고 퇴폐적인 삶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감독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키우던 개가 거리에서 죽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감독은 비록 탈북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 특히 한 사회에서 타자로서 살아야만 하는 모든 사람들의 결국을 보여주려는 것 같이 보인다.
2. 교회의 과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남북관계를 조명하는 영화들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북한의 실상과 탈북자의 현실을, 비록 일부분이겠지만,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제시해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오늘 우리가 북한을 위해, 혹은 탈북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은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남북관계의 화해무드를 가로막는 주 요인으로 영화들이 한 결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념의 차이 혹은 그것을 하나의 도그마로 삼는 태도이다. 남북의 이념은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모든 남북관계를 이해하는 안경이 되고 또 그것을 규정하는 도구와 수단이 되면서 남북관계의 화해무드를 방해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남북관계의 긴장은 엄밀하게 말해서 이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한다. 이것은 매우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데, 오늘날 남북관계의 완화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은 북한 주민에게도 사실은 이념보다는 삶이, 그리고 이념적 정체성보다는 가족의 공동체적인 정체성이 더 절실한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념적인 차이에 묶여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하기 이전에 북한의 주민들을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고 같은 민족과 동포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탈북자를 선교의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 역시 지양되어야 한다. 그들을 우리의 동포로서 그리고 한 인격체로서 인정하는 일이 먼저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한편, <웰컴투 동막골>도 그렇지만 <적과의 동침>(박건용, 2011)은 서로 적대하는 관계 속에서도 어떻게 평화가 이뤄질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경기도 평택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실화에 근거를 둔 작품인데,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풀릴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 때 그곳에서 살며 실상을 직접 겪었던 마을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은 후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전쟁이 났다는 소문과 함께 매우 빠르게 남하했던 북한군은 경기도 평택 산정리에 사는 마을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북한군이 아군에 밀려 퇴각하게 되었을 때 주변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살되었는데 비해 유독 산정리에 주둔했던 북한군은 마을 사람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 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감독은 바로 이런 질문과 더불어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영화의 도입부와 결말부분을 만들어 나갔다. 즉, 남녀의 사랑을 중심 스토리로 삼으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에는 비극적인 결론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은 위협적인 상황에서 저항하거나 혹은 도망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장자의 지도에 따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또한 성심을 다해 섬겼다. 마치 한 가족처럼 대했다고 보면 되겠다. 좌우 대립이 날카로웠던 당시에 북한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부역으로 보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중요한 것은 가족과 마을을 살리기 위한 마을 어른의 고육지계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적을 적으로 대하지 않고 마을 주민으로서, 아들로 혹은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코믹하게 처리되어 그것의 진정성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들을 같은 마을 사람으로 대했다는 사실이다.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화해와 평화의 장면 역시 한 결 같이 인간애, 형제애, 동포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는 점은 서로를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 곧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길임을 역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다. 비록 아직은 탈북자와 북한이 우리에게 낯선 타자일 수밖에 없다 해도, 교회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고도 신속하게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 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면서 한반도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며 핵심 과제이다.
신앙세계 2011년 6월호

저작권자 ⓒ koaspora,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