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이 존재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포함한 세계에게 고통을 일으킨다고 하자. 다시 말해서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다고 할 때, 만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악을 대적하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해주고 있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만 할까?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안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의미를 안다면 그에 따라 반응을 보이거나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유를 모르거나 혹은 부당하게 고통을 받을 경우에는 그 끝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고 심지어 절망하게 된다. 사실 고통의 끝을 모르는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야 하는지. 이 질문은 고통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고통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결국 고통의 의미와 끝, 그리고 그것의 결국을 알고 싶은 것이다. 질문을 다르게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한 하나님이 왜 이런 부당한 고통을 안겨주는 악을 허용하셨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실체적인 의미에서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없음을 내세우며 어떤 방식으로든 양자가 조화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물론 우선적인 가치는 하나님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의 존재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양자가 쉽게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질문은 난제(아포리아)가 되고 삶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 더욱 고통스럽게 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기독교 신학은 신정론(Theodicy)를 통해 대답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악의 존재가 일으키는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악의 경험은 불의한 고통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신앙에 따른 기대와 반대되는 불이익이 일어나게 될 때 신앙을 의심하게 된다. 처음에는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하다가 결국에는 신앙 자체를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성에 대한 의심으로 확대된다. 결국 신앙을 포기하는 일도 생기기 때문에 신정론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궁구되어온 신학적 주제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필요한 일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했기 때문이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고백은 고통과 관련해서도 적용된다. 고통을 받아도 주를 위해 받게 된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고통이야 기꺼이 참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부당하게 일어나는 고통은 조금 다른 문제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해결할 수는 없을까?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원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재산적인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수준의 피해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부 목회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했다. 지구상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유독 일본에 일어난 것에 대해 그 이유를 고민하며 나름대로 신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론은 복음을 거절해왔던 일본인을 겨냥한 하나님의 심판행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이런 해석을 접하면서 급한 마음으로 쓴 글에서 필자는 과연 그렇게 말하게 된 근거를 묻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후에는 무엇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동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대체 이런 식의 생각은 어디서부터 유래하고 또 길들여진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필자가 이르게 된 지점은 신정론이었다. 신정론은 모든 불행과 고통과 악의 문제를 하나님의 전능성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련해서 설명하려는 신학적인 노력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록 믿는 자의 고통의 문제에 관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질문의 영역이 확장되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성찰한다. 신정론의 문제가 사변에서 비롯되지 않고 또 추상적인 맥락에서 논의되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제기된 것이고 또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본다면, 고통과 관련된 생각과 태도는 분명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그 고통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이다. 고통의 현장에서 자신은 벗어나길 바라고, 또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있다 해도 립 서비스로 그칠 때가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고통의 이유를 함께 성찰하면서 더욱 큰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들도 있다.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고통을 분담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절실하다. 고통당하는 자에게 이런 도움이 일어날 때 고통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되며, 인내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악의 존재, 혹은 고통의 현존은 고통의 의미를 탐색하거나 혹은 고통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해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긍휼의 마음과 긍휼의 삶과 긍휼의 실천을 환기시켜 줄 뿐이다. 이것이 고통의 의미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고통을 접하게 될 때 우선적인 과제는 그것의 이유를 탐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결핍으로 인한 것이라면 채워주고, 상실로 인한 것이라면 위로해주며, 병으로 인한 것은 함께 기도하면서 병 낫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하나님에 의해 그들의 고통이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로서 오병이어를 제공해줄 수는 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버려짐이 아니라 소외가 아니라 함께 있다는, 공동체 안에 있다는 확신이기 때문에 비록 작고 또 적은 것이라 해도 큰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인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무슨 노력을 기울이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을 뿐이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자신에게 이뤄지도록 순종하셨을 뿐이다. 바로 이런 순종과 겸손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혹은 내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바른 태도는 그것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만일 내가 고통당하는 일이라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고통을 인내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울어도 함께 울어주는 자가 없고,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는 자가 없는 현실이다. 교회에 긍휼이나 공감이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세상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연약한 자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들과 함께 있고 또 그들의 고통을 분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신정론의 문제는 적어도 믿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는 불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악의 문제는 무엇보다 우리가 실천적으로 함께 극복해야 할 일이며, 특히 긍휼과 공감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다가가기를 촉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탐색하는 사람들이 비록 고통을 분담하거나 실천적으로 위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먼저 실천적인 삶을 살다보면 악의 문제에 대한 이론적인 궁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