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나님, 굶주린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어느 라틴 아메리카인의 기도
젊은 시절 선교단체에서 경험했던 신앙적 한계로 고민할 때 이런 책을 접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긴 시간을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에서 개최된 카이퍼 강좌에서 진행된 강의내용을 엮은 이 책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온전한 복음과 총체적 선교에 목말라 하는 한국교회에서는 성경적 세계관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책이 쓰여진 시점은 냉전시대였고,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부르짖던 학자들조차 빨갱이로 매도되던 상황이었기에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터스토프의 주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성경적이지 못한 이론 때문에 분명한 한계도 보인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1장의 시작에서 인용한 한 라틴 아메리카인의 기도 내용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양비론을 취하지 않고, 단호하게 성경이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 서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냉전시대에 색깔론을 덧씌우기 쉬운 상황에서 이런 발언은 쉽지 않았을 텐데, 충분히 용기 있는 행동이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논리를 논증해 간다는 점에서 기독인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당시 남미의 정치적 불안과 빈곤에서 해방신학의 역할과 의미를 지적하면서도, 그런 역할과 전통이 개혁신학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정통교회가 이를 지향해야 함을 강조한다.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민족 이기주의를 비판한다. 민족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경우로 이스라엘의 유대주의를 든 것도 용기 있는 태도다. 미국 내에서 유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결코 쉽지 않지만, 문제의 대상을 피해가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적한 것은 기독교 지성인다운 모습이다. 민족에 대한 맹신적인 태도가 평화를 훼손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경계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긍정적인 내용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몇몇 부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직업소명설의 한계
사회 변혁적인 기독교를 월터스토프는 세계-형성적 기독교(world-formative Christianity)라고 말한다. 특히 세계-형성적 기독교 가치를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직명소명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루터의 직업소명설은 두왕국론과 연결되어 한계가 있었지만, 칼빈의 직업소명설은 종교적인 제사장의 역할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독인들이 교회 안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막스베버가 말한 것처럼 세속적인 수도사가 되어 사회 곳곳에서 성경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당연히 긍정할만한 일이다.
문제는 직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보다는 자신의 출생신분에 따라 거의 운명론적으로 결정되는 직업소명설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해, 결국 원치 않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잔인한 일이다.
직업소명설은 사회적 지배세력이 사회적 약자들로 하여금 불행한 현실에 순응하게 만드는 데 악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소명설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단순히 종교를 넘어 사회전체로 확대시켰다고 해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세계체제론은 성경적인가?
월터스토프는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을 국제관계를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틀로 사용한다. 윌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론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계속해서 책을 출간하며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장하준 교수의 관점도 세계체제론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체제론'은 성경적 세계관이 아니다. 세계국가들을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분류하고 주변부와 반주변부 국가들이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를 중심부 국가들의 횡포, 장하준 교수식 표현으로 ‘사다리 걷어차기’에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성경적 입장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은 주장도 아니다.
신명기 28장 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민족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겠다고 하셨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위치변동이 중심부 국가들의 횡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국가 전체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이다. 월터스토프는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현실 사회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는 성경과 동떨어진 이론을 가져다가 적용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정의론이 필요하다
이런 책이 한국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이유는 각 나라마다 주어진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월터스토프는 도시와 관련된 부분에서 도시의 미학을 강조한다. 예술을 박물관이나 공연장에 가두어 두지 말고, 도시전체를 문화 예술적인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나 좋은 말이다.
그는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기 전에 더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미리 반박이라도 하듯이 예수님께 향유를 가져온 여인에게 차라리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던 가룟유다의 태도를 인용한다. 문제는 도시를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주께 대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덜란드처럼 공공임대주택의 비율이 35%를 넘어서 충분한 주거환경이 갖춰진 나라에서는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겠지만, 주거환경이 양극화되어 하층민의 주거환경이 극도로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안정적인 주거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도시의 미학보다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다.
이런 책을 번역하고 출간하는 에너지로 우리 상황에 맞는 이론을 정교하게 만들어 보급하는 열정을 볼 수는 없을까? 이런 책이 나올 때마다 기독교 개혁세력들의 뜨거운 반응에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게 되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다소 실망하게 될 때가 많다. 우리 상황에 맞는 기독교 세계관 이론서들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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